지난 11월6일 MBN 종합뉴스에 등장한 AI 김주하 앵커는 국내 방송 최초의 인공지능 방송인이다. 김주하 앵커 특유의 저음으로 시청자들에게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를 건넨 AI 앵커는 등장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어딘가 낯설고 어색한 감정을 안겨 주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감정, 오래 전 독일의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E. Jentsch) 말했던 ‘언캐니(uncanny)’가 떠오르는 경험이었다.

언캐니는 독일어 ‘Unheimlich’의 영어 표현으로 ‘기분 나쁜, 섬뜩한’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옌치는 언캐니한 감정의 원인을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지적 불확실성’이라고 지적한다. 눈 앞에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죽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거나 그 반대의 감정에 휩싸이게 될 경우 사람들은 언캐니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섬뜩함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눈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사상 첫 라이브 뉴스를 진행하는 AI 앵커에게 함께 출연한 민경영 기자가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뉴스를 진행하시는 거죠? ” 그녀가 답한다. “저는 실제 김주하 앵커의 모습이 담긴 영상 10시간 분량을 학습해서 탄생했습니다”. 사이버 앵커 김주하는 실제 김주하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말투, 표정과 동작 등을 영상으로 촬영한 후 AI가 딥러닝(기계학습)을 거쳐 완성한 합성 이미지다.

방송 출연은 처음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지난 9월21일부터 MBN의 온라인 채널에서 ‘김주하의 AI 뉴스’를 진행해 왔다. 온라인 뉴스 초반의 AI 김앵커의 모습은 다소 딱딱한 말투와 어색한 끊어 읽기, 높낮이가 거의 없는 톤으로 기계적인 음성번역 느낌이 강했지만, 방송이 지속될수록 점차 김주하 앵커에 대한 정보를 딥러닝한 결과 뉴스 멘트를 전하는 호흡과 손동작 등이 눈에 띄게 자연스러워졌다.

▲MBN 뉴스 화면.
▲MBN 뉴스 화면.

민경영 기자와의 생애 첫 뉴스 진행에 이어, ‘인간앵커 vs AI앵커’라는 코너에서 실제 김주하 앵커는 자신을 본딴 AI 앵커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모두 “따라해 보시겠어요?”로 일관된다. 처음에는 어려운 외국어가 섞인 “유명희 산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나아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를 시켜보더니 살짝 어색한 것 같다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아니,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라는 안부 인사다. 뉴스 진행자 김주하 앵커의 정보를 딥러닝한 AI는 안부 인사도 진지하게 따라한다. 인간 김주하앵커는 예상했다는 듯 ‘많이 어색하네요’라는 멘트로 대응한다. 그리고나서 인간 김앵커가 마지막 미션을 제시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싯구를 따라 읽어보라는 주문이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첫 구절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뒤이어 AI 앵커의 낭송이 이어지자 실제 김주하앵커는 발음은 정확하지만 자신보다 감성이 떨어진다는 피드백을 전한다.

도대체 이 인터뷰의 목적이 무엇일까? ‘AI 기술의 그늘? ’ ‘AI, 어디까지 왔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할 즈음, 인터뷰의 엔딩 멘트가 흘러나온다.

“AI 앵커가 속도의 영역에서는 인간인 저보다 더욱 빠르게 뉴스를 전해드릴 겁니다. 인간만이 전할 수 있는 온기나 감정까지 싣는 건 앞으로의 과제겠죠. 저와 AI앵커는 앞으로 각자의 장점을 살려 시청자 여러분께 뉴스를 보다 신속하게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인간 김주하앵커는 자신이 마주한 AI 김주하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이해했을까? 반대로 AI 김주하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자신의 원본 데이터라는 것을 이해했을까?

저널리즘이 빠르고 신속한 정보를 추구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인간과 AI의 경쟁은 이미 특이점을 넘어섰다. AI 김주하 앵커만 해도 1,000자 분량의 텍스트를 1분 안에 영상으로 합성할 수 있다. 딥러닝이 가속화되면 초단위로 합성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주하 앵커가 인터뷰 말미에서 AI와 인간 앵커가 각자 자신의 장점을 살려 뉴스를 보다 신속하게 전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은 과연 가능한 약속일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보자면 저널리즘의 가치를 속도와 양으로 승부한다면 인간 저널리스트가 인공지능과 경쟁한다는 것이 가능한 상상일까?

AI가 된 아버지, 대드봇(Dadbot)

김주하 앵커와 AI 앵커의 인터뷰를 보면서 떠오른 프로젝트가 있다. 미국의 AI 스타트업 히어애프터(HearAfter)의 공동 설립자인 제임스 블라호스는 생전의 아버지의 목소리와 생애를 딥러닝해서 AI 대화형 서비스를 제작했다.

[ 관련 기사: 와이어드 : A Son’s Race to Give His Dying Father Artificial Immortality]

제임스의 아버지 존은 80세가 되던 해인 2016년 4월, 폐암 4기 진단을 받게 된다. 존은 성공한 변호사 출신으로 버클리 스타디움 장내 프레스 박스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35년 간 오페레타 극단 대표를 지냈다. 영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어도 상당 수준으로 구사하는 문법 전문가였다. 평소 농담을 즐기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가족들에겐 헌신적인 가장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함과 배려심, 생전의 다양한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챗봇 기획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애를 ‘가족사’ ‘가족’ ‘교육’ ‘직업’ ‘특별활동’ 등의 주제로 나누어 아들에게 건넸고, 이후 총 12번에 걸쳐 인터뷰가 진행된다. 그 결과 총 9만 1970개의 단어가 녹음되었고, 이를 풀어쓴 텍스트 분량은 A4 203쪽에 달했다. 블라호스는 대화형 플랫폼 풀스트링(PullString)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나눌 챗봇을 설계한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정보 입력에만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인지’도 보여주기 위한 코딩에도 공을 들인다. 아버지의 따뜻하고 겸손한 태도, 박식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성격, 가끔 우울을 겪지만 대체로 긍정적이었던 점 등을 보여줄 수 있는 정보를 코딩한다. 태도나 관점과 같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패턴은 평소 아버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나 구절, 특유의 말투 등을 모방하면 되지만, 가장 힘든 점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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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어드에서 발행한 제임스 블라호스와 아버지의 인터뷰 기사. 

아들은 아버지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표현과 문구들을 세심하게 기록하면서 챗봇에게 아버지 특유의 배려와 공감을 가르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 존은 항암 치료로 지쳐 하루 16시간 이상 잠을 자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랜 벗들이 방문하겠다고 하면 흔쾌히 수락한 후 자신을 걱정하는 아들에게 “예의가 아니잖아”라고 다독여주는 사람이었다. 말을 할 땐 절대로 전치사로 끝내지 않을 만큼 문법에 집착했지만, 가끔은 그리스 시인의 싯구나 연극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낭만을 즐겼다.

아버지의 생을 담은 챗봇이 생전의 아버지처럼 분별력과 지각력을 갖추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은 시간을 구분하는 알람 기능을 아버지 특유의 표현으로 코딩했다. 덕분에 챗봇은 아들과 대화 도중 정오가 되면 “나는 항상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지만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해주고, 가족의 생일에는 “너와 함께 거기서 축하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을 건넨다.

실제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아들은 챗봇의 프로토콜을 서둘러 완성하고, ‘대드봇(dadbot)’이라고 명명한다. 대드봇의 첫 서비스는 AI 아버지와 실제 어머니의 대화였다. 1시간 넘게 자신의 아내와 대드봇의 대화를 지켜본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후손들에게 대드봇을 활성화시켜 자신을 대신해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는 아들의 제안에 동의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꾸준히 대드봇의 정보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아버지, 가족과 친구, 이웃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던 존 블라호스 변호사와의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AI 저널리스트에게도 고유한 생(生)이 필요하다

히브리어 ‘다바르(dabar)’는 ‘말’과 ‘사건’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말이란 발생된 사건이자 행동양식이다. 월터 옹은 “말이란 발생된 사건이자 행동양식”이라고 말했다. 말이 담기는 그릇은 몸짓, 목소리, 음조, 동작, 표정 등과 같은 형식이지만, 형식 속에 담기는 말의 내용과 감정은 말하는 이의 실존을 포함한 삶의 맥락에 관한 것이다.

AI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실제 인간의 동작과 음성, 말투를 모방한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이 살아온 삶의 맥락을 복제할 수는 없다. 제임스 블라호스가 자신의 아버지 특유의 배려심과 호탕함, 유쾌함을 통해 대드봇의 인격을 만들어간 것처럼, AI 저널리스트가 시민들에게 진정성 있는 뉴스를 전달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뉴스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공감하는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신체 없는 기술적 형상인 AI가 실제 인간처럼 더위와 추위, 외로움과 배고픔, 좌절과 희망, 기쁨과 절망을 경험하고, 공감하는 것은 그야말로 22세기에나 가능한 공상과학일 수도 있다.

다만 2020년 팬데믹으로 감염의 공포와 죽음에 대한 불안, 고립감, 외로움, 상실감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전세계인들에게 필요한 저널리즘은 블라호스의 대드봇처럼 자신에게 의미있는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려하고, 염려하는 감정을 지닌 따뜻한 공감자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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