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야간작업 하다 숨진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2주기가 다가왔다.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도록 산안법을 고쳤지만, 정작 김용균이 일했던 곳엔 적용되지 않는다. 고 김용균 2주기 추모위원회가 오는 12월 6~12일까지 추모주간을 마련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요구하며 릴레이기고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울산 현대공고 3학년 현장실습생 김대환 군(19)은 2013년 가을 학기부터 울산 북구 모듈화산업단지 안에 있는 금영ETS라는 공장에서 일했다. 

해를 넘긴 2014년 2월10일 밤 울산지역엔 폭설이 내렸다. 김군은 이틀 뒤 열릴 졸업식 때문에 현장실습 나왔던 여러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대부분 출근하지 않았는데도 나와서 일했다. 

밤 10시17분 김군이 일하던 공장 지붕이 폭설에 무너졌다. 무너져 내린 건물 지붕에 깔린 김군은 살려달라고 외쳤고, 달려온 직장 동료가 손을 잡았다. 지붕을 들어 올릴 장비는 오지 않았고, 그렇게 19살 청춘은 차가운 공장 바닥에서 죽어갔다.

현장실습생에겐 하루 7시간 노동이 정상이고, 꼭 필요해서 연장근로를 시키더라도 1시간만 가능했다. 밤 10시 이후 야간노동은 아예 금지다. 

이런 기본만 지켰다면 밤 10시17분에 무너진 공장 지붕에 김군이 사고 당하는 일은 없었다. 

사고 뒤 회사를 찾은 어머니는 회사 사장의 냉대를 받았다. 졸업식을 마친 친구들이 공장 담벼락에 ‘대환이를 살려내라’고 붉은 라커 칠을 했다.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과 지역 노동계가 유족들과 함께 공장 앞에 천막을 쳤다. 정의당 국회의원이 울산에 내려와 현장과 학교를 찾고서야 조사가 이뤄지고 대화의 문도 조금씩 열렸다. 

차가운 2월의 거리에서 한 달을 보낸 끝에 3월11일 유족은 회사와 합의하고 다음날 김군의 장례를 치렀다. 김군은 친구들의 운구를 받으며 3년을 다녔던 학교에 들러 노제를 지내고 하늘공원 화장장으로 갔다. 

▲ 2014년 2월 고3 현장실습생 김대환군이 숨진 공장 앞에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앉은 어머니(왼쪽)와 누나. 사진=용석록
▲ 2014년 2월 고3 현장실습생 김대환군이 숨진 공장 앞에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앉은 어머니(왼쪽)와 누나. 사진=용석록

장례 사흘쯤 뒤 내가 일하던 ‘울산저널’ 사무실로 50대 부부와 20대 여성이 찾아왔다.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선 세 사람은 “대환이 가족입니다”라고 입을 뗐다. 울산지역엔 거대 지상파 3사의 지사.지국도 있고, 일간지만 8곳이나 성업 중인데 세 사람은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구독자 3천 명 남짓했던 작은 주간 신문사를 찾았다. 

폭설 뒤 여러 사고 소식에 묻어 1보만 썼던 주류 매체를 대신해 작은 대안미디어가 김군 사망 이후 장례까지 한 달여 무려 10번의 기사를 썼다. 취재기자는 거의 매일 농성천막에 들러 유족을 만났다. 

세 분과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한없이 착하기면 했던 아들이 사고를 당한 그 시각 어머니는 직선거리 1km 남짓 떨어진 또 다른 공장에서 야간작업 중이었다. 아버지는 도로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전국을 떠돌았다고 했다. 두 살 위 누나는 구미에 있는 대기업 TV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누나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가 주목하는 요주의 공정에서 일했다. 

어머니의 충격이 가장 컸다. 숨진 아들과 어머니는 비록 다른 공장에서 일했지만, 그 결과물은 모두 5km 남짓 떨어진 현대자동차로 납품됐다. 어머니는 아들 장례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다니던 공장에 출근하지 못했다. 지역단체의 도움으로 심리치료를 받은 뒤 어렵사리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을 나갔다. 

우리는 일가족 4명 모두가 일하는데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나라에 산다. 우리는 그 일마저도 목숨 내놓고 해야 하는 것만은 멈춰달라는 소박한 요구를 ‘과잉입법’이라고 비판하는 언론의 홍수 속에 갈아간다. 이런 언론 보도에 국회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도 구미에서 일했던 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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