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출근, 오전 9시 퇴근. A방송사 아침 6시 뉴스에서 일했던 작가 ㄱ씨 일과다. 밤 10시 출근해 원고를 다듬어 방송국 서버에 올리면 어느새 자정, 그럼 숙직실에서 3시간 잠을 청한다. 새벽 3시엔 일어나야 6시 생방송을 대비할 수 있다. 

아이템 변경, 뉴스 원고 작성 등이 데스크 지시 아래 숨가쁘게 진행된다. 생방송 중엔 부조정실 뉴스 자막기 앞에 앉아 PD 지시에 따랐다. 방송이 끝난 후에 남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귀가했다. 그러나 오후 1시부터 다시 업무다. 데스크가 퇴근하는 저녁 6시 전에 내일 아이템 후보 15개를 검토 받아야 했다. 이후 밤 10시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이렇게 일한 ㄱ씨, 정말 프리랜서일까.

▲지난 13일 방송사·제작사들이 모여있는 서울 상암동 거리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김순미 방송작가유니온 사무국장.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13일 방송사·제작사들이 모여있는 서울 상암동 거리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김순미 방송작가유니온 사무국장. 사진=손가영 기자.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이 보도국 작가는 대표적인 ‘위장 프리랜서’라며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싸움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업무 특성상 프로그램 일정과 데스크 지시에 종속돼 일하는데도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건 모순이라는 주장이다. 지난 17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김순미 방송작가유니온 사무국장을 만났다. 

“방송작가의 근로자 지위가 인정된 선례가 없습니다.” 김순미 국장은 이제 이 말을 그만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작가라면 프리랜서 계약부터 하고 보는 관행이 문제이지 선례가 있고 없고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당장 어제(16일)도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다. MBC 아침 뉴스프로그램 ‘뉴스투데이’ 작가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다룬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에서다. 10년 동안 이 프로그램에서 일한 작가 ㄴ씨는 지난 6월 계약 기간을 6개월 남겨두고 갑자기 계약이 해지됐다. 김 국장은 조합원인 ㄴ씨를 응원하기 위해 심문에 참관했다. 이 자리에서 MBC 관계자가 “선례가 없다”고 주장했고 지노위원 일부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국장은 발언권을 얻고 심문 자리에서 말했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하는 방송작가는 아무도 없다. 그냥 우리를 프리랜서라고만 한다. 그러나 자율성을 갖고 원고를 완성해 납품하는 그런 이들이 프리랜서다. 매일 정해진 시간·장소에 출근해 업무 지시를 받으면서 일하는 작가는 노동자다. 실질을 봐달라.”

▲지난 9월 MBC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한 작가 ㄴ씨 근무 모습.
▲지난 9월 MBC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한 작가 ㄴ씨 근무 모습.

데스크 없이 작가 맘대로 원고 쓴다? 어불성설

최근 작가들 일각에선 보도국 작가의 노동자성 인정을 두고 관심이 높다. 뉴스 작가가 계약 해지에 ‘부당해고’를 주장하는 사례가 올해 2건이나 생겼고, 또 다른 JTBC 뉴스 작가는 올해 중순 고용노동청으로부터 ‘퇴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노동자성 확인까지 받았다. 

프로그램별로 업무 환경은 다르지만 보도국 작가는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생방송’과 ‘보도’다. 프로그램이 매일 같은 시각에 방송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고정적이다. 저녁 8시 뉴스를 맡으면 적어도 오후 12시나 1시까진 출근한다. 아이템 검색·선정, 토론자 섭외, 원고 작성 등 기본 업무를 하는 데에만 대여섯 시간이 걸린다. 생방송인 경우 방송국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뉴스 순서가 수시로 바뀌고 긴급 사건도 부지기수로 터지기에 다른 제작진과 실시간으로 협업해야 방송사고가 나지 않는다. 

이들의 일은 창작이나 예술로 묶기도 어렵다. 드러난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기자와 유사하다. 기자들이 매일 새로운 발제를 해 기사를 쓰듯 작가들은 새로운 아이템을 보고하고 원고를 쓴다. 기자처럼 취재를 나가거나 패널을 섭외하고 앵커 멘트를 쓰는 등 기자들보다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한다. 

작가는 아이템이나 원고 내용을 결정할 권한도 없다. 뉴스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모든 내용은 데스크의 감독을 거친다. 보도는 방송사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부문이기 때문에 보도국은 데스크의 지휘·감독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보도국 제작진 중 사전적 의미의 프리랜서를 찾기란 어렵다. 김 국장이 “‘방송작가=프리랜서’는 없어져야 할 도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MBC 보도국 시사프로그램인 ‘뉴스외전’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작가 A씨가 2019년 9월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제공
▲MBC 보도국 시사프로그램인 ‘뉴스외전’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작가 A씨가 2019년 9월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제공

독소조항 고치랬더니 ‘해지 예고 기간’만 7일 늘려 “꼼수”

“근로계약을 주장하기 전에 문체부 표준계약서조차 제대로 쓰지 않는 게 현실이다.” 김 국장은 이번 ㄴ씨의 계약 해지가 불과 9개월 전 MBC ‘뉴스외전’ 작가의 사건과 똑같다고 말했다. ‘계약 해지 예고 기간’ 1달을 둔 점만 달랐다. 뉴스외전 작가는 계약이 3개월 더 남은 상태에서 해지를 통보받고 그날 바로 퇴사됐다. 뉴스투데이 작가는 1달 전 계약이 해지된다는 통보를 들었다. 1달 후 남은 기간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나갔다. 

김 국장은 계약서의 ‘독소조항’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짚었다. ‘7일 전 예고하면 계약 중도해지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2주 전 예고’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뉴스외전 작가의 계약서엔 “양자 의사 표시로 계약을 중도 해지할 수 있고 마지막 방송 7일 전 예고하고 본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방송작가유니온 등을 중심으로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자 올해엔 예고 기간을 ‘2주 전’으로 늘렸다. 

방송작가유니온 조사 결과 MBC 보도국은 지상파 3사 가운데 문체부 표준계약서를 유일하게 도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 국장은 “KBS·SBS는 표준계약서를 도입했고, MBC도 시사교양국은 표준계약서를 쓴다”며 “뉴스외전 논란으로 최승호 전 MBC 사장이 국정감사에서 문제 조항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단지 일부 문구만 고쳤다”고 비판했다. 표준계약서는 “부득이한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 상호 합의 하에” 계약 변경이 가능하다고 정한다.

‘예능 작가’는 되는데 ‘뉴스 작가’는 안된다니

보도국 작가는 올해 12월10일 시행되는 ‘예술인 고용보험’ 대상에서도 빠졌다. 개정 고용보험법이 적용 대상을 예술인복지법상의 예술인으로 두면서다. 문학, 미술, 사진, 건축, 무용, 음악, 국악, 연극, 영화, 연예, 만화 등이 적용 분야다. 예능국 작가는 ‘연예’ 분야에 포함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뉴스를 다루는 보도국 작가는 어떤 분야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보도국 작가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도 기댈 곳이 없는 셈이다. 방송국의 지휘·감독 아래 일하지만 프리랜서 계약을 맺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특수고용직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보험법이 개정됐으나 ‘예술인’이 아니란 이유로 또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다. 

김순미 국장은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 부처에 보도국 작가는 왜 적용 대상이 아니냐고 계속 항의하고 있으나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해야 한다’는 답만 받고 있다”며 “노동자성이 가장 강한 보도국 작가들이 노동자도, 예술인도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인 작가 2명이 지노위에서 부당해고를 다투고 있다. 모두 MBC 뉴스투데이에서 10년을 근속하다 계약기간 6개월을 남겨두고 일방 해지된 작가들이다. 김순미 국장은 “방송국은 명확히 프리랜서처럼 자율성을 가지고 일할 사람과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그렇지 않으면 근로계약을 해야 한다”며 “두 조합원의 부당해고 싸움에 연대해 함께 싸워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