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혐오표현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혐오표현에 대한 처벌이 미진하다는 지적과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저해해선 안 된다는 우려 사이에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대응이 주목 받고 있다. 경남연구원은 17일 ‘혐오표현에 대한 지역의 법적규제-일본 사례를 중심으로’(이혜진 연구위원) 브리프를 발행했다.

일본의 혐한 표현 논란이 본격화한 계기는 2013년 일본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 쓰루하시 등지에서 벌어진 반한 시위다. 당시 ‘재일교포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이 일본 각지에서 인종차별 시위를 주도하면서 ‘헤이트 스피치’를 우려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당시의 대대적인 반한시위 전에도 재특회는 도쿄 조선학교를 습격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요집회 반대를 선언하는 등 재일 한국인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부추긴 바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6년 5월 일본의 ‘혐오표현 규제법’(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를 위한 조치 추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다. 야당이 공동으로 제출했던 ‘인종 등을 이유로 한 차별 철폐를 위한 시책 추진에 관한 법률안’이 여당 반대에 부딪혀 여당 제출안이 처리됐다. 차별적 의식을 조장·유발할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생명·신체·자유·명예 또는 재산에 위해를 가하겠다고 하거나, 일본 외 출신자를 모멸하고 지역사회로부터 배제하도록 선동하는 행위를 ‘차별적 언동’으로 규정했다. 차별 해소 활동을 국가·지자체 책무로 두고 중앙정부 책임을 의무화했지만, 벌칙조항이 없고 인터넷상 표현은 규정하지 않은 한계가 지적됐다.

▲ 경남연구원은 17일 ‘혐오표현에 대한 지역의 법적규제-일본 사례를 중심으로’ 브리프를 발행했다.
▲ 혐오표현에 대한 가와사키시 벌칙 적용 순서도. 출처=경남연구원 ‘혐오표현에 대한 지역의 법적규제-일본 사례를 중심으로’

경남연구원은 “그럼에도 ‘혐오표현 규제법’은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가 차원의 의지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당한 차별적 언동은 허락되지 않음을 국가적으로 선언하고, 혐오표현을 인권교육과 계발(계몽)활동을 통해 해소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해 국가와 지역사회가 교육과 계몽 홍보, 상담창구 설치 등 지역의 실정에 따라 시책을 고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짚었다.

특히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은 혐오표현 규제를 위한 조례를 제정·시행하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혐오표현 규제법’보다 실효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2016년 ‘오사카시 혐오표현 대처조례’를 만든 오사카시는 시민으로부터 혐오표현을 제보 받아 ‘혐오표현심사회’ 자문을 거친다. 그 결과 혐오표현으로 판단되면 관련 게시물의 관리자 등에게 철거 및 삭제(인터넷)를 요청하고, 오사카시 차원에서 혐오표현을 행한 사람·단체 이름을 공표한다. 다만 실제 조치까지는 상당한 논의 절차·시간이 소요된다. 실제 2016년 7월 자문을 요청받은 혐오표현심사회가 3년간 24차례 조사·심의를 진행, 오사카시는 2019년 12월 행위자 이름을 공표한 바 있다.

혐오표현 발화자를 최대 형사처벌에 처하는 곳도 있다. 지난 7월부터 ‘가와사키시 차별없는 인권존중 마을만들기’ 조례를 전면 시행하는 가와사키시다. 2015년 일본 정부가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을 추진하면서 재일 한국 여성들이 반전 시위를 벌이자, 일본 내 극우세력이 이들을 위협한 일이 발단이 됐다. 이를 계기로 결성된 시민네트워크는 중앙정부의 혐오표현 규제법이 부족하다고 판단, 가와사키시의회를 설득해 조례 제정을 이끌었다.

가와사키시는 인권시책기본계획 수립하고 인권 교육 및 계발활동, 조사·연구, 차별·인권침해 피해자에 대한 상담 외 지원 등을 시행한다. 시장 자문기구인 ‘인권존중 마을만들기 추진협의회’, 구제기관은 ‘차별방지대책 등 심사회’를 두고 있다. 금지 조항을 위반한 자는 횟수에 따라 1차례 ‘권고’, 2차례 ‘명령’, 3차례 ‘행위자 이름 공개 및 50만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가와사키 시장은 권고·명령에 앞서 전문적 제3기관인 심사회 의견을 청취해야 하며, 공표 전에는 혐오표현을 발화자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벌금의 경우 가와사키시가 고발한 사건에 대해 검찰 또는 법원이 판단한다. 인터넷상 혐오표현은 형사규제 대상이 아니지만, 가와사키시가 심사회 의견을 청취해 확산방지조치를 하도록 돼 있다.

▲ 2019년 9월7일 오후 일본 도쿄도(東京都) 시부야(澁谷)구 시부야역 광장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조장하는 흐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 한국·조선인 등에 대한 차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는 최근 일본 주간지가 '한국 따위 필요 없다'는 특집 기사를 싣는 등 일부 미디어들이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것에 우려를 느낀 시민들이 제안해 열렸다. ⓒ연합뉴스
▲ 2019년 9월7일 오후 일본 도쿄도(東京都) 시부야(澁谷)구 시부야역 광장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조장하는 흐름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 한국·조선인 등에 대한 차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는 최근 일본 주간지가 '한국 따위 필요 없다'는 특집 기사를 싣는 등 일부 미디어들이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것에 우려를 느낀 시민들이 제안해 열렸다. ⓒ연합뉴스

경남연구원은 “일본의 법제도상 차별한 사람에 대한 형사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조례가 최초”라며 “차별적 취급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차별적 말과 행동에 대한 형사처벌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가와사키시 조례에는 전문에 국제인권조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인권법상 의의도 가진다”고 했다.

2019년 4월 전면 시행된 ‘도쿄도 올림픽 헌장에 주장된 인권존중의 이념 실현을 위한 조례’도 있다. 조례의 목적과 도쿄도의 책무를 규정한 1장, 성정체성·성적지향 차별 해소를 명시한 2장,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를 위한 3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밖에 이주배경을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 해소·금지가 포함된 사례로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타가야구 다양성을 인정한 남녀공동참획과 다문화공생을 추진하는 조례’ △도쿄도 구니다치시 ‘구니다치시 인권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평화로운 마을만들기 기본조례’ △고베시 ‘고베시 외국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해소와 다문화공생 사회의 실현에 관한 조례’ △오사카부 ‘오사카부 인종 또는 민족을 이유로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 추진에 관한 조례’ 등이 있다.

경남연구원은 “여전히 방송이나 선거 영역 이외에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는 별다른 법적 방법이 없다. 상위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효성 있는 선진적인 조례를 만들기에는 제도적 어려움이 있다”며 “각 기관에서 자율적으로 혐오표현을 주제하는 자율적인 조치나 규범을 만들고, 예방대책을 세우고, 혐오표현이 발생했을 때 어떤 방식과 절차로 처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난항을 겪는 지금, 경상남도 및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법률 제정을 기다리기보다는 지자체의 실정에 맞는 인권보호 및 차별방지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의 주민이 안심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고 진취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구성원의 삶을 지원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지방정부의 책무”라는 것이다. 경남연구원은 “인권은 권리 보유자의 주장만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므로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나 행정조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일상의 인권 침해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기에 인권 실행의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인권보장체제 구축과 인권실행을 위한 사회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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