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비정규직 남용 문제는 취재기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군에서 확인됐다. 촬영기자부터 그래픽 디자이너, 특히 ‘방송국의 심장’에 비유되는 주조정실의 필수 인력까지 프리랜서와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남용되고 있었다

KBS 영상 그래픽 디자이너로 14년 일했던 프리랜서 ㄱ씨는 지난해 12월 자신이 ‘KBS의 직원처럼 일했다’는 법적 판단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실이 공개한 ㄱ씨 부당해고 사건 기록을 보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KBS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며 그의 부당해고를 인정했다.

ㄱ씨는 KBS 후반제작부에서 ‘VR(가상현실)’이라 불리는 3D 특수 영상을 주로 제작했다. KBS는 2010년 ‘이슈&뉴스’ 코너를 만들며 VR을 접목한 뉴스 콘텐츠를 선보여왔는데, ㄱ씨는 실제 이 코너에 필요한 특수 영상을 제작했다. 올림픽이나 선거처럼 VR 제작물이 급증하는 기간엔 물량을 처리하느라 더 바빴고, ‘생로병사의 비밀’ 등 일부 프로그램 특수 영상도 부정기적으로 맡았다.

▲2005~2019년 영상 그래픽 디자이너 ㄱ씨 계약관계 도식화. 디자인=안혜나 기자.
▲2005~2019년 영상 그래픽 디자이너 ㄱ씨 계약관계 도식화. 디자인=안혜나 기자.

 

14년 동안 ㄱ씨가 체결한 계약만 ‘24번’. 2014년 1월부터 2019년 6월30일까지 해고 전 5년 6개월 동안만 21번이다. 계약 종류도 다양했다. 일을 시작한 2005년 8월엔 2년 프리랜서로 일했다. 이후엔 개인사업자를 등록해 3년 10개월 간 KBS 자회사를 통해 일을 도급받았다. 그 후 파견업체에 고용된 파견노동자로 일했다. 파견법상 최대 파견 기간인 2년이 지나자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와 1~6개월짜리 계약을 21번 갱신하다 지난해 6월 계약이 종료됐다. “제작 수요가 감소했다”는 이유다.

ㄱ씨가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낸 이유는 자신이 ‘무늬만 프리랜서’였기 때문이다. “시간·장소에 구속되지 않고 프로젝트에 필요한 제작을 본인 자체 판단에 의해 독립적·창의적으로 수행한다”는 계약서 조항은 형식이었다. ㄱ씨 카카오톡 등엔 정규직 팀장·직원들과 긴밀히 협업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함께 일했던 감독급 직원이 ㄱ씨를 도왔다. 그는 ㄱ씨가 ‘정직원처럼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일했다’고 진술서를 써줬다. “영화산업처럼 이 업무는 20년 동안 시각적 측면에서 콘텐츠 경쟁력의 큰 축을 담당했는데 신입사원이 곧바로 제작하기 어려워 전문성과 숙련성을 갖춘 경력직 프리랜서를 채용했다”며 “원래 직원으로 채용해왔으나 IMF 사태 이후 비정규직화됐다”고도 밝혔다. ㄱ씨 해고 당시 KBS 후반제작부 감독 이하 직원들은 정규직원 10명과 프리랜서 1명, 파견노동자 3명이었다.

▲KBS 뉴스에 활용된 VR 특수영상 기술 갈무리.
▲KBS 뉴스에 활용된 VR 특수영상 기술 갈무리.
▲자료사진.ⓒpixabay.
▲자료사진.ⓒpixabay.

 

직원 뽑을 자리에 프리랜서 써

쉬운 해고는 다른 CG 기술자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연달아 해고됐던 JTBC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 ㄴ·ㄷ씨 일이다. ㄴ씨는 입사 1년 1개월 만, ㄷ씨는 7개월 만이었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한 이들 사건에 노동위원회는 “JTBC가 근무 장소·시간을 지정했고, 관리자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업무 내용도 회사가 정했고 JTBC 비품을 이용해 작업했다”며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당시 JTBC는 ㄴ씨가 ‘실적이 부진’하고 ㄷ씨는 ‘제작 물량이 줄었다’며 계약 만료를 통보했다. 특히 JTBC는 ㄴ씨가 해고 후 고용노동청에 퇴직금 지급 진정을 넣자 2주 후 ㄷ씨를 포함한 나머지 디자이너 3명에게 일괄 계약 해지를 밝혔다. “CG제작파트의 사정으로 프리랜서 업무를 종료한다”는 이유가 다였다.

노동위는 ‘물량이 줄었다’는 JTBC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JTBC는 자회사에 CG 작업을 계속 의뢰하고 있었다. 이에 “이밖에 추가 물량이 있어 프리랜서를 활용했고, 그 프로그램 개수가 감소했다. ㄷ씨가 근로자라해도 기간제로 간주된다”고 해명했다. 노동위는 “기간제라면 업무가 일정 기간 후 명백히 종료되거나 종료 시점이 특정될 수 있어야 하는데 ㄷ씨는 그렇지 않다”며 기각했다.

촬영, 편성, CG… 영역 가리지 않아

MBC강원영동의 ‘프리랜서’ 촬영기자 ㄹ씨는 차별 처우에 반발하다가 잘렸다. 2015년 6월, MBC 지역사에서 일한 지 20년째였다. ㄹ씨는 1995년 삼척MBC(2015년 MBC강원영동으로 합병)에서 11년 동안 계약직 촬영기자로 일하다 2006년부터 프리랜서 계약을 했다. 2007~2011년 동안은 인력파견업체에 고용됐다가 다시 2011년부터 해고 전까지 프리랜서 계약을 1년 단위로 체결했다. 20년간 같은 일을 하면서 계약만 8번 넘게 맺었다.

삼척MBC 촬영기자 4명 중 3명은 정규직, 1명이 ㄹ씨였다. 그의 노동자성을 확인한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는 “회사가 업무 내용을 지시했고, ㄹ씨 업무는 나머지 정규직들과 동일했으며 ㄹ씨는 매일 오전 9시 전 출근해 저녁 6시 이후까지 회사가 제공하는 설비·비품을 이용해 근무했다”고 밝혔다.

ㄹ씨는 해고 직전 월급제에서 주급제(주 단위로 급여 지급)로 바꾸려는 회사 권유에 반발해 정규직 전환과 차별 시정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회사에 보낸 적 있다. ㄹ씨는 한 달여 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영상취재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법원은 “근로자인 ㄹ씨에게 해고 사유와 시기를 서면으로 통지하지 않았으니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무효”라고 밝혔다.

▲한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했던 방송사 주조정실 모습. MD 직군은 방송 운행에 필수적인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한 방송국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했던 방송사 주조정실 모습. MD 직군은 방송 운행에 필수적인 인력이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늘어났다.

 

MD(Master Director) 간접고용도 대표적인 비정규직 남용 사례다. MD는 프로그램, 광고, 캠페인, 예고방송 등이 편성운행표에 맞게 정확히 송출되도록 관리하는 방송운행책임자다. 방송사고와 직결되는 필수 인력으로 ‘주조정실’에서 일한다. 주조정실은 방송국 내외부 모든 방송신호가 모여 ‘방송국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이 자리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인력파견업체가 채우기 시작했다. 한 방송사의 MD는 “24시간 교대근무라 힘들고, 반복적인 업무라 정규인력들이 업무를 기피하면서 외주화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파견노동자들은 방송사가 인력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면 그대로 해고될 수 있어 매년 고용불안을 느낀다. 지난 10년간 부당해고를 주장한 MD는 최소 3명이다. 2016년 KBS, 2018년 TJB대전방송, 2019년 CJB청주방송의 MD가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KBS 경우 해당 MD가 자회사 고용에 합의하며 소송을 취하했다. 청주방송은 1심이 진행 중이다.

TJB대전방송은 소송을 낸 ㅁ씨 퇴사 이후 MD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ㅁ씨는 ‘7년 차’ 때 해고됐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는 인력업체가 TJB로 파견한 파견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TJB는 ㅁ씨를 '1년 짜리' 기간제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했다. 이듬해 다시 1년 기간제 근로 계약을 맺었으나, 두 번째 계약이 끝나는 날 갱신이 되지 않으면서 ㅁ씨는 해고됐다. 그는 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에서 패소해 현재 3심 진행 중이다

▲지상파 3사 및 이들의 지역 계열사와 종합편성채널 JTBC 노동위원회 사건만 포함됐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지상파 3사 및 이들의 지역 계열사와 종합편성채널 JTBC 노동위원회 사건만 포함됐다. 디자인=안혜나 기자

 

밀려난 ‘비핵심업무’, 비정규직 늘어나

2012년 대전MBC와 부당해고로 다퉜던 ㅂ씨 이력에선 방송사들이 비정규직 일자리로 밀어낸 업무를 볼 수 있다. 오디오맨, VJ, 뉴스PD 등이다. 대부분 ‘비핵심업무’로 구분해 프리랜서나 계약직을 채용한다.

ㅂ씨는 1996년 2년 1개월 계약직 ‘오디오맨’(촬영기자 보조)으로 시작해 2010년까지 입·퇴사를 반복했다. 그는 2000년엔 파견직 오디오맨으로 1년 11개월 근무했다. 5년 후 프리랜서 VJ로 입사해 1년 일했고, 이어 파견직 뉴스PD를 맡아 2년 동안 뉴스데스크 등의 진행을 맡았다. 끝난 직후 1개월여 간은 ‘고향매거진’ VJ를 맡다 2010년 12월 다시 뉴스PD로 채용됐다. 이번엔 2년 계약직이었다. 추가 계약은 없었다. ㅂ씨는 이에 충남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지만 기각됐다.

대전MBC는 당시 심문과정에서 “뉴스PD 업무를 비핵심업무로 분류해 2012년 12월 (ㅂ씨 계약 종료 이후) 파견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리랜서·비정규직 고용이 가장 드문 직군은 기자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실이 지난 국정감사 때 발표한 공공부문 45개(MBC·KBS 제외) 방송사 비정규직 분석에 따르면, 45개사 기자 354명 중 비정규직은 6명(1.7%)이었다. 기간제 등 직접고용 비정규직인 3명, 프리랜서가 3명이다.

비정규직 비율은 기자를 제외한 모든 직군에서 최소 15%는 넘는다. 행정사무관리직(15.7%), 방송기술제작직(17.5%), PD 등 보도제작직(32.2%), 컨텐츠 등 영상제작직(41.3%), 시설 보안(45.2%), 시설관리(51.6%), 청소·경비(80.5%) 순이다. 보도제작직 32.2% 중 22.8%가 프리랜서 비율이고, 영상제작직도 29.9%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