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표 시절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이 만들었던 혁신안이 결국 후퇴했다. 여권 인사들이 성폭력 의혹으로 물러난 자리에 다시 후보를 내려고 ‘당 소속 선출직공직자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직위에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헌을 바꾸기로 했다. ‘전 당원 투표로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추가하는 방식이다.

알려진 대로 이 조항은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당을 혁신하겠다며 만든 제도다. ‘부정부패 사건으로 직위를 상실한 경우’ 공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모호하고 사문화됐기에, ‘중대한 잘못’이라는 대목을 추가했다. 공천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장도 ‘추천하지 않는다’로 강화했다.

그러나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공석으로 무공천 조항이 조명되자, 중대한 선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박 전 시장의 죽음과 새 지도부 출범 시기가 맞물리는 상황에서 여권 내 의견은 분분했다. 지난 7월 이낙연 당시 당대표 후보는 ‘일의 순서’를 논하며 “어느 것이 진정으로 거대 여당다운 책임 있는 선택인가에 대한 공천논의는 연말쯤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10월 말, 민주당은 권리당원·대의원 투표로 당헌을 바꿔버렸다. 민주당은 이 투표 결과 ‘찬성률 86.64%의 당심’으로 무거운 선택을 하게 됐다고 밝혔지만, 투표 참여율은 26.35%에 그쳤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3개월 전과 지금 바뀐 것은 보궐선거가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는 조급함이다. 이낙연 대표가 말한 “거대 여당다운 책임 있는 선택”은 결국 일부 당원의 지지에 기대는 방식이 됐다.

▲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오른쪽)와 김태년 원내대표가 10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같은 당 소속 정정순(충북 청주 상당) 의원 체포동의안에 대한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민중의소리
▲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오른쪽)와 김태년 원내대표가 10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같은 당 소속 정정순(충북 청주 상당) 의원 체포동의안에 대한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민중의소리

어떠한 규정이든 바뀔 수 있다. 현실에 맞지 않으면 헌법도 바꿀 수 있고, 당의 헌법격인 당헌도 그렇다. 중요한 건 명분과 설득이다. 하지만 지금 여당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명분보다 당위에 가깝다. 5년 전 당내 반발을 딛고 혁신안을 만든 문재인 대통령(당시 당대표)이 경남 고성군수 재선거 관련해 “이번 재보선에서 우리 당 귀책사유로 치러지게 된 지역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또다시 후보 내놓고 표 찍어 달라고 한다”며 유권자 심판을 호소한 일화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민주당에 따라붙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꼬리표는 꾸준히 쌓여왔다. 불과 며칠 전 인사청문회 관련 논의도 한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5부요인·여야 환담회에서 “인사청문회도 가급적 본인을 검증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좋은 인재를 모시기가 정말 쉽지 않다. 청문회 기피현상이 실제로 있다. 본인이 뜻이 있어도 가족이 반대해서 좋은 분들을 모시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동석한 박병석 국회의장이 “후보자 도덕성 검증은 비공개로 하고, 정책과 자질 검증은 공개하는 방향으로 청문회 제도를 고치려 하고 있다”고 말하자 이렇게 화답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대통령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2013년 1월 당선인 신분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 의원들과 간담회에서 “신상털기식 인사검증 안 된다”며 “신상검증은 비공개로 할 수밖에 없고,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는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집중 점검해야 한다”고 말해 집중포화를 맞았다. 취임 이후 연이은 국무총리 임명 실패를 겪은 뒤에는 “총리 후보자의 국정 수행 능력이나 종합적인 자질보다는 신상털기식, 여론재판식 여론이 반복돼 많은 분들이 고사하거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며 “여야가 현행 인사 청문회 제도의 개선 방향을 모색해 달라” 촉구했다.

당시 박기춘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밀봉 인사에 이어 ‘밀봉 청문회’ ‘깜깜이 청문회’로 공개 검증을 피해보겠다는 발상”이라고 격하게 반발했다. “고위공직자가 될 사람의 도덕성, 전문성, 공인의식을 검증하는 것은 국회의 기본책무이고 국민의 알권리”라는 것이다.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인사청문 제도 관련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신상털기식 인사청문회는 문제가 있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 해서 새누리당이 발 빠르게 행동하는 듯하다”고 비꼬았다.

여당, 야당이라는 정치적 위치에 따라 인사청문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문제는 지금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에 공히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없다는 것 또한 공통점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사청문회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된 계기는 이른바 ‘조국 사태’였다. 장관직 임명이 정치쟁점화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제서야 ‘도덕성 검증은 따로 하자’는 논의가 공론화되면서 힘겨루기의 연장선이 돼버린 것이다.

인사청문법을 둘러싼 여야 공방이 그대로 재현되는 배경에는 청와대 인사검증의 불투명성이 있다. 전임 여당과 지금의 여당 모두 ‘도덕성’과 ‘직무능력’을 분리해서 청문회를 진행하자는 주장을 펼치면서, 청와대의 사전 후보 검증 시스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청와대 인사검증은 비공개’라는 답변은 역대 어느 정부의 인사청문회에서든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 행해온 인사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 2015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무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기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민중의소리
▲ 2015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무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기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민중의소리

2011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이 고 권재진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에 지명했을 때 민주당 국회 법사위원들은 “법치국가의 기본 틀을 흔드는 일”이라 비판했다. 이들이 집권한 2019년엔 조국 민정수석이 법무부장관에 지명됐다. 되레 지금의 여당에선 ‘소장파’가 사라졌다. 권재진 장관 지명 당시 소장파 모임 ‘새로운 한나라’ 의원들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다. 남경필 현 경기지사, 고 정두언 전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2020년의 민주당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언론인의 청와대 직행도 마찬가지였다. MBC 출신 윤도한 전 국민소통수석, 한겨레 출신 여현호 전 국정홍보보서관, 중앙일보 출신 강민석 대변인 등. 퇴사시점과 간격이 있었으나 김의겸 전 대변인도 한겨레 기자 출신이다. 언론인의 청와대행은 여전히 논쟁의 영역에 있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때와 달리 정권의 노골적인 언론장악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엄혹한 시기를 보낸 뒤에도 언론인이 정치권에 직행할 수 있다는 현실은 또 한편의 퇴행일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은 4년 동안 대체로 꾸준한 지지를 받아왔다. 절실함을 갖고 국민을 설득할 필요성은 오히려 덜 수 있었다. 절반 내지 과반의 여론이 있었기의 ‘국민의 뜻’을 전유할 수 있었다. 쉬운 정치가 이어지는 동안 양극화는 공고해졌다. 조국 사태,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을 비롯한 정치 현안에서 극과 극으로 양분된 여론이 드러나고 있다. 그 사이를 채워야 할 정치적 공간은 점차 협소해졌고 힘없는 목소리는 쉽게 무시됐다. 하지만 그 과반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명분을 버린 민낯이 탐욕이라는 여권 원로의 목소리를 아프게 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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