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미디어 생태계를 바꿔놓았습니다. 특히 지역 방송은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비단 코로나19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지역 방송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계속돼 왔습니다. 미디어오늘은 학계와 시민단체, 지역방송 구성원들의 기고글을 통해 지역 방송의 정체성부터 다매체 환경에 놓인 지역 방송의 자구 노력, 나아가 정부의 지역방송 정책에 대한 방향을 묻고자 합니다. 지역방송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하고 있는 부분도 따끔하게 질타하는 목소리를 담겠습니다. 지역 방송 존재가치를 묻는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해당 릴레이 기고는 미디어오늘과 MBC계열사 전략지원단이 공동기획했습니다. - 편집자주

 

‘목판 10만장 수집운동’

경상북도가 설립한 국학연구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과 지역방송인 안동MBC가 지난 2004년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지속적으로 펼쳐온 대대적인 캠페인이었다. 대부분이 경상도 지역의 문중이나 서원 등에서 보관해오던 목판들은 한동안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집안일을 하던 아낙들이 빨래판으로 쓰거나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선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흩어져 있던 목판을 모아 보물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지역의 공공기관과 지역방송사가 힘을 모아 노력한 결과 그렇게 모아진 ‘한국의 유교책판’이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공론(公論)에 의해 ‘공동체 출판’ 형태로 출간됐으며 500여 년간 지속된 ‘집단 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캠페인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718종 6만4226장이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이다. 계륵(鷄肋)같던 ‘애물단지’를 잘 모으고 가꿔서 그 가치를 정확하게 밝혀내자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보물이 된 것이다.

▲ 2013년 9월17일 안동MBC 뉴스 ‘‘유교목판’, 세계기록유산 준비’ 갈무리. 사진=안동MBC뉴스 유튜브
▲ 2013년 9월17일 안동MBC 뉴스 ‘‘유교목판’, 세계기록유산 준비’ 갈무리. 사진=안동MBC뉴스 유튜브

역사는 더 오래되었지만 지역MBC도 1980년대 초·중반에는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으니 각 방송사 영상자료실에는 적어도 수 만권의 테잎이 쌓여있다. 어떤 것은 제목만, 심지어 아무런 표시도 없이 덜렁 테잎만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장 쓰지도 않을뿐더러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방송사에서 비용만 들어가는 상황이니 푸대접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역방송사 구성원들 중 그 영상자료들을 없애자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한 지역방송사에서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낙하산으로 지역에 내려온 사장이 방송외 수익을 내겠다며 제시한 사무공간 임대사업. 방송사 건물 한 층을 임대 시장에 내놓으려 대체 공간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 영상자료실이었다. 결국 수십 년 된 보물들은 유해폐기물 처리 업체에 돈까지 주면서 실려 나갔고, 그 와중에 그 보물들을 지켜내려는 구성원들의 눈에 띄어 찾아낸 U-matic 테잎 한 권에는 1987년 텔레비전 개국 당시 첫 전파를 탔던 소중한 영상이 남아 있었다. 그런 우연이 아니었다면 개국축하방송 프로그램은 지금쯤 시커먼 연기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지역방송사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다시피하고 있는 영상자료다.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0월28일 한국정책방송원과 지역MBC는 콘텐츠 교류 및 홍보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KTV가 운영하는 개방공유형 아카이브 서비스를 통해 KTV가 촬영한 정부 부처 및 기관 관련 영상콘텐츠와 ‘대한뉴스’ 등을 개방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지역MBC 역시 공적인 가치가 있는 해당 지역의 영상 기록들을 KTV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KTV는 보유하고 있는 영상자료를 판매하는 형식으로 외부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정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책도 달라져 세금으로 생산된 영상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무료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역방송사들 역시 보다 나은 품질의 방송 서비스를 위해 뉴스와 프로그램 등에서 관련 영상자료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자원인 영상콘텐츠를 지역 공영방송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지역방송이 생산해 낸 영상자료들은 지역사회의 과거 모습을 동영상으로 기록한 소중한 공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우리는 수 백 년 전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지역방송 영상자료실에 쌓여있는 먼지 쌓인 테잎들은 우리 지역민들의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한민국 비수도권 곳곳의 40년 가까운 역사가 영상으로 남아있다. 이 보다 더 훌륭한 자원이 어디에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현황파악 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측밖에 할 수 없지만 지역방송사별로 적어도 수만 권 이상 분량의 영상자료들이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잠들어 있을 것이다. 분류도 정리도 안되었고 아카이브는커녕 디지타이징도 되지 못한 채 햇빛 볼 날만 기다리고 있다. 구슬도 꿰어야 보물이듯 물리적 충격이나 열화로 아예 확인도 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온기를 불어 넣어줘야 한다. 지역사회가 함께 수 십년 전의 생생한 모습들을 되살려내 꿰어야 한다. 신음하고 있는 지역방송에 좀 더 확장된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공적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회적 공기로 되살려내야 한다. 전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뉴딜’, 지금 지역방송은 디지털 뉴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역방송이 만들어낸 영상들이 공공의 기록자료로 가치를 인정받게 될 따뜻한 손길 말이다.

▲ 강병규 안동MBC 콘텐츠제작국장
▲ 강병규 안동MBC 콘텐츠제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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