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경북 칠곡 쿠팡물류센터에서 근무하던 스물일곱 살의 노동자가 숨졌다. 올해만 과로사로 숨진 택배 노동자가 열세 명에 이르니 국정감사 의제가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국정감사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26일 국회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과 쿠팡 물류담당 자회사 전무의 질의응답은 기대는커녕 거대한 벽을 느끼게 했다.

국감장의 쟁점은 고인의 근무시간과 일수라는 숫자였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고인이 올 8월과 9월 동안 각각 주 70.4시간, 69.4시간을 근무하고 7일 연속으로 근무한 이유를 물었다. 사망원인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담당 전무는 8,9월이 아닌 총근무기간인 16개월의 월 평균 근무일수 19일로 반박했다. 7일 연속근무 또한 주단위 기준이 아닌 2주에 걸쳐 7일을 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간근무로 60시간 이상 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쿠팡측은 다시 평균치를 꺼냈다. 고인은 실제로 평균 주 44시간을 일했고, 60시간 근무라는 주장은 야간근무 시간을 주간보다 30% 가산하여 계산하기 때문에 나온 수치라는 것이다.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쿠팡의 책임과 위법성을 따지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시간을 거론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근로시간을 정한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는 모든 노동이 시간으로 구분된다. 법정근로시간,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 연장근로시간, 휴게시간과 유급주휴일에서 유급연차휴가까지 모두 일정한 기간 동안의 노동시간과 그에 따른 임금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쿠팡측이 고인의 죽음을 시간 계산 논쟁으로 끌고 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두고 “법을 위반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자본의 오래된 반박은 다양한 노동의 특성과 질을 무시하는 시간의 폭력이기도 하다.

▲ 지난 10월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 및 사망 노동자 유가족들이 ‘쿠팡 규탄 및 유가족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경북 칠곡의 쿠팡 물류센터에서 근무해온 일용직 노동자 A씨가 집에서 숨졌다. A씨는 업무강도가 가장 높은 곳에서 근무했고 코로나19 이후 물량이 늘었음에도 인력충원이 되지 않았던 점을 들어 대책위는 과로사 가능성을 제기했다. ⓒ 연합뉴스
▲ 지난 10월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 및 사망 노동자 유가족들이 ‘쿠팡 규탄 및 유가족 면담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경북 칠곡의 쿠팡 물류센터에서 근무해온 일용직 노동자 A씨가 집에서 숨졌다. A씨는 업무강도가 가장 높은 곳에서 근무했고 코로나19 이후 물량이 늘었음에도 인력충원이 되지 않았던 점을 들어 대책위는 과로사 가능성을 제기했다. ⓒ 연합뉴스

스물일곱 살 노동자에게 심야근무란 무엇이었을까. 주간근무보다 근로시간을 더 인정받아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을까.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에 끝나는 심야근무는 노동자에게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저녁에 귀가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한참 업무를 하는 시간에 소음을 참으며 잠을 청해야 한다. 친구들과 저녁 약속도 잡을 수 없고 천 만 관객을 넘겼다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기도 어렵다. 주변 지인들 뿐 아니라 가족과도 함께할 시간이 없는 노동이 바로 심야근무다. 흔히 ‘낮밤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런 생활패턴은 삶을 위한 노동이 노동을 위한 삶으로 바뀌는 소외의 정점이다.

스물일곱.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많은 시도를 해야 할 삶의 한 때는 26일 국회 국정감사의 시간 논쟁에 묻히고 말았다. 청춘을 하루하루 갉아먹는 노동으로 고인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는 누구도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삶을 위한 노동은 자본 뿐 아니라 법령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시간과 임금의 노동이 아니라 사람이 누리고 싶은 삶으로 눈길을 돌리면 더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보다 노동하지 않을 시간이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마주한다. 기후 변화로 갑자기 작물의 가격이 급등하면, 이를 재배하는 농민들 중에 평년보다 더 적게 수확하는 이들이 있다. 대도시에 비가 내려 택시 승객이 많아지면 목표액을 더 빨리 채워 일찍 운행을 끝내는 기사들도 있다. 이들에게 노동은 삶을 영위할 수단이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국정감사의 근무시간 논쟁을 보며 거대한 벽을 느꼈던 이유는 그래서다. 노동자가 얼마나 일했기에 죽음에 이르렀는가보다, 얼마나 쉬지 못했으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못했으면 죽음에 이르렀는지 묻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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