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MBN·드라맥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마성의 기쁨’(제작사 골든썸픽쳐스) 임금 체불은 아직 진행 중이다. 연출·촬영·조명·미술감독 등 스태프를 포함해 일부 배우, 작가 등도 받아야 할 대금을 받지 못했다. 총 금액만 4~5억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전체 피해자는 60명을 넘는다. 거의 제작진 전원이 피해자다. 수백만원에서 억대 규모의 체불까지 다양했다. '감독급'을 제외한 현장 스태프 대부분은 받아야 할 금액의 60%를 받고 “일체 민·형사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서명했다. 지난해 7월 께다. 

고용노동부에 넣은 임금체불 진정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다. 이들은 제작사 골든썸픽쳐스가 두 달 넘게 체불임금을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2018년 12월 체불임금 진정을 넣었다. 7달 후,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결됐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고정급여 없이 촬영 회차당 대금을 받았다”는 이유다.

▲2018년 MBN과 드라맥스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마성의 기쁨'. 제작사는 골든썸픽쳐스, 제작을 맡긴 채널은 IHQ다.
▲2018년 MBN과 드라맥스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마성의 기쁨'. 제작사는 골든썸픽쳐스, 제작을 맡긴 채널은 IHQ다.

불리한 합의를 왜 했느냐는 말에 스태프 A씨는 “돈 줄 의지가 없는 제작사를 상대로 스태프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로 보지 않으니 노동청 도움을 받기 힘들고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도 어렵다. 민사소송은 막대한 비용에 비해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법원의 강제집행도 제작사에 압류할 재산 자체가 없으면 소용없다. 부족한 돈이라도 받는 게 이익이라는 계산이 설 수밖에 없다. 

가장 사각지대는 감독급(팀장) 스태프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에도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4개 드라마 제작현장을 근로감독한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7월 감독 스태프 아래의 ‘팀원’ 스태프들만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했다. 감독들은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본인 책임 아래 독자적으로 일을 한다”는 게 이유다. 

노동자성은 고용노동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임금이 체불되면 노동부에 진정하거나 고소할 수 있고, 부당해고에 구제 신청을 할 수 있다. ‘프리랜서(자유계약자)’로만 간주됐던 팀원 스태프들은 이제 고용노동부에 구제 신청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지만 감독 스태프는 배제됐다. 

▲추혜선 의원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은 이날 오후 2시 국회에서 "드라마 제작 기술팀 스태프 ‘노동자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용욱 기자
▲추혜선 의원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은 지난해 6월 10일 국회에서 "드라마 제작 기술팀 스태프 ‘노동자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용욱 기자

민사소송에도 ‘한숨’ “폐업 상황이면 돈 못 받아”

이 경우 스태프들은 민사 소송밖에 없다. 법원이 채무 상환을 명하는 지급명령부터 손해배상, 부당이득반환 등의 소송이 있다. 대부분 지급명령을 신청해 채권 등을 압류하는 강제집행 절차를 거친다. 

많은 스태프들은 여기서 포기한다. 변호사비, 소송 준비 시간 등 비용에 비해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서다. ‘기획 폐업’은 방송계에서 흔히 알려진 관행이다. 제작사 대표들이 빚이 쌓인 업체는 폐업 수순을 밟게 만들고, 다른 제작사를 만들어 자금을 빼돌리거나 수입 활동을 따로 이어가는 사례다. 폐업 법인엔 강제집행의 효력이 없다.

‘마성의 기쁨’을 두고서도 피해 스태프들은 기획 폐업을 의심한다. 골든썸픽쳐스는 현재 재무적으로 사실상 폐업 상태다. 사업자로 등록된 대표와 실질적인 대표가 다른 데다 임금체불 사태가 길어지면서 서류상 대표는 연락이 두절됐다. 실질적 대표로 활동하던 김아무개씨는 다른 엔터테인먼트 업체에서 영업 활동을 계속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진 30여명에게 총 1억2000여만원이 체불된 FTV 예능 프로그램 ‘뻥꽝’ 경우도 피해 스태프만 발을 동동 굴린다. 지난 6월께 체불 사태 당시 고용노동부를 찾았던 스태프 B씨는 진정서를 낸 자리에서 바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진정을 포기했다.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해 절차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미 제작사는 사실상 폐업 상태에 들어섰다. 

형사 고소를 해보자는 스태프들도 있지만 마땅치 않다. 근로기준법 위반을 주장해도 이들이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가 시작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뻥꽝’ 피해스태프 C씨는 “수사기관이 움직여야 제작사들이 뜨끔이라도 한다”며 “그런데 ‘사기’로 고소하기도 힘들다. 대표가 가끔 연락이 될 때마다 ‘갚겠다’고 문자를 보내니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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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태프 열에 셋 임금체불 겪는데 “아무도 안 도와줘”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지난 8~10월간 드라마 스태프 33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년 안에 임금이 체불되거나 아예 받지 못했다고 답한 스태프는 열에 셋이었다. 22.1%는 임금 지급 지연을 겪었고, 5.2%는 아예 체불됐다. 둘 다 겪어본 응답자도 4.8%였다. 

예술인들 임금체불 사건을 지원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최근 3년간 ‘예술인 신문고’에 접수된 전체 임금체불 신고 428건 중 방송계 비정규직 건은 84건이라고 밝혔다. 이 중 36건은 모두 민사 소송으로 법적 절차가 진행됐다. B씨는 “임금 체불은 흔하지만 방송스태프들은 고용노동부, 법원, 수사기관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용노동부가 감독 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높아진다. 5년차 촬영감독 E씨는 “회당 버는 대금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포장하지만 어디서, 언제 촬영할지를 촬영감독이 정하느냐”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까진 지시받고 일한다. 셔터를 누르는 동안 축적된 전문성을 발휘하지, 내가 독단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동을 하는데 왜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느냐”고 말했다. 

이들은 영화 스태프들이 노동조합 등을 통한 투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실에 주목한다. 2005년 설립된 영화산업노조는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꾸준히 주장했고 2014년 이후 영화 현장엔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확산돼 현재 관행으로 안착했다. 2018년 10월엔 영화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법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도 나왔다. 

▲2017년 7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등이 영화 '아버지의 전쟁' 스태프 및 배우 임금체불 소송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
▲2017년 7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등이 영화 '아버지의 전쟁' 스태프 및 배우 임금체불 소송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

지난 1월엔 감독급 영화 스태프들의 노동자성도 법원에서 처음 인정됐다. 2016년 제작에 돌입했던 영화 ‘아버지의 전쟁’은 투자자·제작사 간 갈등으로 촬영이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스태프들 임금이 대거 체불됐다. 서울동부지법은 이 사건 미술감독·현장편집기사·촬영감독·녹음감독 등 감독급 스태프 7명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제작사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고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감독 스태프가 같이 일할 직원을 추천하거나 제작사나 프로듀서로부터 거의 지휘를 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한 측면이 있지만, 이들 급여는 기간을 정해 총액으로 약정돼 특정 업무의 완성을 목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도급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이 업무 중 지휘·감독을 사실상 받지 않은 건 업무가 전문적이어서 제작사 개입이 필요 없거나 적절하지 않아서지 제작사에게 지휘, 감독 권한이 없어서가 아니”라고도 했다. 

수천만원이 체불된 ‘마성의 기쁨’ 스태프 F씨는 “피해를 겪으며 비로소 내 계약서가 ‘용역계약’이고, 이걸 쓰면 노동을 해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보호 받아야 할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갑은 법률가를 고용해 법망을 피하는 계약서를 쓸 수 있게 돕는다”며 “할 수 있는 일은 제작사에 전화해서 ‘돈 있으세요? 돈 좀 주세요’ 얘기를 하는 것 밖에 없다.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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