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제안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검토해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의 이 한마디에 민주노총은 “악의적”이라 비판했고, 청와대는 “지극히 원론적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청와대 설명처럼 이 한 문장만 봐서는 구체적 내용이 없다. 그런데 노동계는 왜 거세게 반발한 걸까.

황 수석의 이 발언은 15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 마지막 부분, ‘야당 쪽에서 노동법 개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어떤 입장이냐’는 사회자 질문에 따른 답이었다. 황 수석은 “아직 야당에서 노동법 개정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은 없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해고를 쉽게 한다든가 이런 류의 과거 정부의 개혁 같은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냐 이런 의견도 있다”면서도 “실제로 김종인 비대위원장께서 해고를 쉽게 한다거나 하는 개혁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셔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제안하시는 것인지에 따라 검토해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더 쉽게 해고를 하고 임금을 삭감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나아가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는 개악논의를 하자는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발언과 제안에 대해 검토할 수 있다는 발상은, 부적절함을 넘어 악의적”이라며 “일자리 수석의 발언은 개인적 발언인가, 아니면 청와대 시각과 입장인가. 황덕순 수석은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왼쪽)이 15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유튜브 갈무리.
▲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왼쪽)이 15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유튜브 갈무리.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노동법 개정안 관련 발언은 이미 노동계는 물론, 여당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응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이 구체적인 법안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맥락상 노동 유연화, 즉 임금·해고의 수월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해된다는 이유다. 5일 김 위원장은 “공정경제 3법 뿐이 아니고 노사관계, 노동법 관계(법)도 함께 개편할 것을 정부에 제안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OECD 발표에 의하면 141개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의 고용·해고 문제는 141번 중에서 102번째에 달하고 있고, 노사관계는 141개 국가 중에서 130번째에 달하고 있고, 우리 임금의 유연성에 관련해서는 84번째 위치를 차지하는 매우 후진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가져가려면 반드시 노사관계에 노동법 관계를 함께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달성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와 여당은 공정경제 3법 뿐이 아니고, 노사관계와 노동법 관계를 함께 개정하는 시도를 해주길 제안드린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6일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고용·해고 문제” “노사 관계” “임금 유연성” 등을 언급하며 인용한 지표는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평가결과’다. 한국노총은 7일 “‘WEF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는 공정성 및 신뢰성 자체에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지적돼 왔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보호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보호수준은 다른 회원국에 비해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전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한 바 있다. 요컨대 경영계 논리에 따른 “노조혐오에서 비롯된 노동관계법 개편”이라는 주장이다.

보수·경제매체들은 김 위원장 발언에 ‘노동 개혁 신호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6일 조선일보는 1면에 “‘성역인 노동법 바꿔야’ 김종인이 꺼내든 화두”라는 기사에 이어, 3면 전면을 관련 주제에 할애했다. △현대차 노조를 사례로 든 ‘귀족노조’가 문제라는 기사(3명이 할 일, 1명에 몰아주고 영화관람…근무중 낚시도 갔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배제한다는 지적이 담긴 기사(김종인이 원하는 노동법 개정은…근로시간·임금 유연하게 하되, 노조 단결권은 강화) △문재인 정부가 친노동 정책만 쏟아내고 있다는 기사(文정부는 친노동 정책 쏟아내…獨·伊는 좌파정부때 노동개혁) 등이다.

매일경제도 1면(김종인의 역제안 “노동법도 고치자”)에서 “경영계는 물론 당내에서도 김 위원장의 기업규제 3법 찬성 입장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김 위원장이 경영계의 오랜 숙원 중 하나인 노동관계법 개혁 카드를 꺼내든 것이어서 주목된다”고 반색했다. 이어진 기사에선 △노조 편만 드는 노동법…기울어진 노사 균형추 바로 잡을까 △재계 “만시지탄…이제라도 논의해 다행”이라는 재계 중심 반응을 다뤘다. 특히 익명의 경제단체 관계자를 통해 “노동법이 성역처럼 여겨졌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신산업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산업 구조 재편을 위해서는 노동 관계법 정비도 필요하다는 정치권 인식이 확산해야 한다”는 평가를 전했다.

‘노동법 개정’이라는 김 위원장 구상이 노동 안정성 약화를 의미하는 방향으로 여겨지면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선을 그었다. 이낙연 대표는 6일 “노동자의 생존 자체가 벼랑에 서 있고 노동 안정성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시기”라며 “이런 시기에 해고를 자유롭게 한다든가 임금을 유연하게 하는 메시지가 노동자들께 매우 가혹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음날 김태년 원내대표도 “일언반구조차 없다가 갑자기 입법 검토에 착수하겠다는 것 자체가 노동관계법을 정략적 수단으로 삼는다는 방증”이라며 “노동법 개정이 공정경제 3법 처리를 발목 잡겠다는 속셈에서 제시한 정치적 카드라면 국민의힘은 노동법 개정 주장을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민중의소리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민중의소리

이런 시점에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노동법 개정안도 검토할 수 있다’는 청와대 일자리수석의 입장은 ‘여당과의 엇박자’, ‘여당에 비해 전향적인 태도’ 등으로 해석됐다. 매일경제는 16일 기사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야당 제안에 극단적인 반발을 이어가는 것과 분명한 온도차가 느껴진다”(노동개혁 불씨 살아날까…靑 “구체안 나오면 검토”)고 평가했다. “황덕순 수석 노동법 관련 MBC라디오 인터뷰 발언은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이며, 노동법 개정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다”(강민석 대변인)라는 청와대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전후 맥락이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 대선 공약이기도 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며, 국제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법을 방치해왔다. 유럽연합(EU)은 한국에 ‘근로자’ 정의가 너무 좁아서 특수고용노동자·실업자 등이 노조 가입·활동을 할 수 없고, 노조 설립을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는 등 결사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며 노동 관계법 개정을 권고해왔다. 지난해 6월 정부가 관련 법안들을 발의했으나 대의원·임원 출마자격을 단위사업장 조합원으로 제한하고, 해고자가 사업장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등 허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EU가 ‘ILO 협약 비준 지연은 한-EU 간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라며 무역 분쟁 절차에 돌입했다. 한국이 FTA 역사상 노동권 규정을 위반한 첫 사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16일 통화에서 “재계 입장에서는 지금 정도만 통과돼도 쾌재를 부를 수 있는 법안이 발의됐고, 정부 입장에선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통상압력이 있는 상황에서 (노동관계법 등을) 패키지로 처리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상황”이라며 “이런 시점에서 나온 일자리 수석 발언을 개인적 내지는 원론적 수준의 발언으로 보기에는 수상한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올해 전태일 열사 50주기인데 아직도 전체 사업장 65%가 근로기준법 혜택을 못 받고 있다. 매년 코로나19 사망자보다도 더 많은 산업재해 사망자들이 발생해왔다”며 “노동유연화라는 게 막말로 ‘쉽게 자르겠다’는 건데, 일자리를 책임지는 일자리수석 입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고 하는 건 너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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