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낙태죄’가 정부 입법예고로 돌아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11일 임신중단한 여성과 의료진에 처벌을 규정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1년 반이 흘러 개정 시한인 2020년 12월31일이 다가오기까지 공론화 과정은 없다시피했다. 그러다 별안간 정부가 비공개리에 관련법 개정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향신문의 지난달 21일 보도 ‘“낙태죄 형법개정’ 5개 부처 장관회의…‘낙태죄 기준 임신 14주 논의’”를 통해서다.

보도는 국무총리실이 9월23일 법무부·여성가족부·보건복지부·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등 5개 부처 장관들을 소집해 임신 14주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형법 개정안 작업을 마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입법예고 당일 아침인 지난 7일 기사는 청와대가 낙태죄 유지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고, 지난 6~7월 이 같은 안이 공론화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사실상 결정됐다고 했다. 여가부와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가 낙태죄 전면 폐지 입장을 강하게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입법예고일인 지난 7일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입법예고일인 지난 7일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보도는 파장을 불러왔다. 여성인권단체와 보건의료계가 성명을 냈고 직접행동에 나섰다. 여성들이 ‘#나도 낙태했다’라며 자신의 임신중단을 택한 경험과 그 배경을 밝히는 해시태그 운동을 퍼뜨렸다. 그러나 보도 속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정부는 7일 임신중단을 처벌하는 조항을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 내에는 조건 없이, 15~24주에는 성범죄나 사회적·경제적 등 사유가 있으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해당 사안을 취재한 이보라 경향신문 기자는 “낙태죄 유지 법안을 되돌리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첫 보도 이후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인가…철학자가 파헤친 낙태죄 결정”, “[단독]‘낙태죄 유지, 청와대 의지 강했다’…6~7월 이미 결론” 등 후속 기획과 단독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기자는 정부의 개정안 작업과 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폐쇄성’에 가장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이보라 기자를 11~12일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경향신문 여성서사 아카이프 플랫의 “세상에 낙태를 하려고 임신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낙태했다” 캡쳐
▲경향신문 여성서사 아카이프 플랫의 “세상에 낙태를 하려고 임신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낙태했다” 캡쳐

경향신문은 이 기자뿐 아니라 편집국 차원에서 낙태죄 폐지 관련 입장을 각 부서와 논설실, 기고를 보도하고 있다. 입법예고를 내다보는 기사를 1면 머리에 실었고, 정책사회부와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팀’도 임신중단을 선택한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 기획인터뷰 등 보도를 이어갔다. 사회부 데스크가 임신중단 비범죄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썼고, 여성단체 활동가들 기고도 예정돼 있다. 편집국 내부 토의를 거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기 위해 ‘임신중단(낙태)’ 표기를 쓰기로 했다.

- 어떻게 정부의 낙태죄 ‘비공개 법 개정’ 과정을 취재하게 됐나?
사회부에서 법무부와 검찰에 출입한다. 수년 전부터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보도해오던 터에 낙태죄 개정안 주무부처인 법무부를 담당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었다. 이하늬 기자가 제보를 받았고 내가 본격 취재를 맡았다. 정부 안팎의 정보원을 통해 취재와 보도를 했는데, 면면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들 역시 낙태죄 개정이 이렇게 이뤄져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이보라 경향신문 기자.
▲이보라 경향신문 기자.

- 낙태죄 법개정에 청와대와 각 정부 부처 입장이 갈린 배경은?
여가부는 여성 입장을 반영해야 하는 부처 특성으로 낙태죄 전면 폐지 입장을 지켜왔던 것으로 안다. 법무부의 경우 추미애 장관이 낙태죄 전면 폐지 의지가 강했고, 다만 부처 내부에서도 의견 차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보건복지부나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은 의료계나 종교계 등 각계를 의식해 반대 입장을 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다만 이번 사안이 정부 부처 수준에서 결정하기 힘들고, 청와대의 결정이 주요했을 것이란 취재원의 말이 신빙성이 크다고 본다. 해외도 주수를 둔 경우가 많기에 14주 기준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간 청와대가 여성 문제 전반에 대한 해결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거나 지켜오지 않은 점도 그렇다.

-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입법예고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기자로서 소통과 공론화 부족이 가장 문제라 본다. 사실 낙태죄를 두고 사회적 논의가 풍부하지 못했다. 태아가 생명을 가졌다면 법적 권리인 ‘생명권’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 등 풍부하고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낙태는 살인이다’와 같은 납작한 수준의 주장이 반복됐다. 실질적 소통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취재로 확인했다. 여성계와 의료계는 6~7월쯤 사실상 결론이 난 정부 초안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고, 올해 공식적 간담회는 한 차례에 그쳐 소통 부재를 지적한다. 낙태죄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당사자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이미 수개월 전 결론을 낸 뒤 형식적 소통에 그쳤다고 판단한다.

▲지난 12일 경향신문 오피니언면 손제민 사회부장의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해야 하는 이유’ 칼럼.
▲지난 12일 손제민 경향신문 사회부장의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해야 하는 이유’ 칼럼.

-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의 문제는?
임신중단 처벌이 실제로 임신중단율과는 상관없다는 통계가 거듭 나왔다. 임신중단을 하려고 임신을 하는 사람은 없고, 임신중단이 허용됐다고 해서 이를 남발하는 사람도 없다. 다들 각자 삶에서 주어진 사회경제적 기반에서 최선의 선택을 통해 임신중단이라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일 뿐이다. 임신중단을 14주, 24주로 제한하는 건 임신중단과 관련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 받지 못하거나 의료 서비스에 접근이 힘든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의 임신중단을 더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청와대와 정부 부처 곳곳을 취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담당자들이 함구하거나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확인해주지 않는 이들 가운데 “6~7월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거나 “논의할 만큼 했다”며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식 발언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 와중에 일부 취재원들이 확인을 해 줬고, 취재가 가능한 선배들의 협업으로 보도에 이르렀다.

▲낙태죄 헌법불합지 결정이 나온 지난해 4월1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사진=김예리 기자
▲낙태죄 헌법불합지 결정이 나온 지난해 4월1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사진=김예리 기자

- 적절하거나 올바른 임신중지 관련법 입법안, 논의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정부는 이제라도 남은 의견 수렴 기간 동안 여성계 등 시민사회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 특히 여성의 목소리를 적극 들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공청회나 간담회 등을 열어도 좋다. 시민사회가 의견을 표출할 기회와 시간도 남아있다. 정부가 연내 입법을 목표로 의견 수렴을 거치겠다고 했다. 또 낙태죄 전면 폐지를 담은 법 개정안도 발의(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됐고, 인터넷상 의견 제출 시스템 등을 통해 의견을 제출할 경로가 있다.

- 언론이 이 사안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겨레도 이 사안을 1면에 보도했고 SBS도 1~2번째 뉴스로 다루는 등 주요하게 보도를 이어나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낙태죄 형법 적용 대상자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더 힘을 실으려 했던 점이 아닐까 싶다. 언론이 이번 사안의 무게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보지만 낙태죄로 피해를 입는 여성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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