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라는 표현은 문재인 정부에서 살아가는 소수자의 현주소처럼 굳어졌다. 최근 성전환 수술한 군인을 강제 전역시킨 일과 관련해서도 정부는, 이를 지적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법·규정이 부재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시기상조라 답했다. 기시감은 2017년 2월에서 온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공개석상에서 성소수자의 돌발 질문을 듣고 “나중에 말할 기회를 드리겠다”고 답하자, 지지자들이 “나중에”를 연호하며 질문자를 제지한 일.

문재인 정부는 보수 유권자들도 등 돌린 ‘적폐 정부’를 몰아내고 들어 선 ‘촛불 정부’다. 시급한 ‘개혁’ 과제의 우선순위에서 소수자 목소리는 줄곧 밀려났다. 그렇게 4년차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은 꾸준히 50% 가까운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최초로 레임덕 없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런데 그 “나중에”는 언제 오는 걸까.

2018년 문재인 정부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제3차)에서 ‘성소수자’를 지웠다. 최소한 ‘성소수자’를 써두기라도 했던 박근혜 정부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성소수자 관련 사안엔 ‘사회적 합의’라는 문구가 따라다녔다. 2017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한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국민과의 대화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여당에서도 차별·혐오적 언동이 반복되고 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윤호중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은 성소수자 문제를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표현했다. “선거에서 이슈가 되는 게 좋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이유였다. 김회재 의원은 ‘차별금지법 반대 기도회’ 참석에 이어, 국회에서 보수개신교 단체와 관련 토론회를 개최하려다 코로나19 때문에 취소했다.

▲ 2017년 4월26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습시위에 나섰다 제지 당하고 있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천군만마 국방안보 1천인 지지 선언'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었다. ⓒ 연합뉴스
▲ 2017년 4월26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습시위에 나섰다 제지 당하고 있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천군만마 국방안보 1천인 지지 선언'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었다. ⓒ 연합뉴스

국제성소수자협회(ILGA) 유럽지부가 개발한 ‘무지개지수’ 한국지표는 하락세다. 2017년 11.85%, 2018년 11.7%에 이어 2019년엔 8.08%까지 떨어졌다. 한국 뒤에 있는 국가는 아르메니아(6.49%), 터키(5.16%), 아제르바이잔(3.33%) 뿐이다. 일부 평가 항목(성특징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헌혈, 트랜스젠더의 부모 신분 인정 등)이 추가·조정된 영향이 있다. 그러나 평가를 맡은 SOGI법정책연구회는 “반성소수자 단체의 혐오선동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에 동조한 공공기관의 차별도 심각했다”고 꼬집었다.

이종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 촛불 운동으로 탄생한 정권임에도 소수자 관련 정책적 방향이나 실행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며 “올해 초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 전역 조치나, 숙대 입학 예정이었던 학생의 등록 취소만 봐도 성소수자 혐오·차별은 존재한다. 개선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군형법(동성간 성행위 처벌조항 등) 관련 이슈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야겠지만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논의가 실종된 또 다른 대상은 이주민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이주민 정책 평가를 묻는 질문에 이한숙 이주와인권연구소 소장은 “2018년 예멘 난민사태, 2019년 이주민건강보험제도 개악만 봐도 달라진 게 없다”고 답했다. 이 소장은 “기존에 이주민 인권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적어도 이 정도는’이 있었다. 보수적인 정부들은 이주민인권에 관해 뭔가 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인권 지향하는 정부’라고 홍보하는 면이 있었다. 지금은 이주민이 희생양으로서 타깃이 되는 분위기가 더 큰 것 같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는 당연한 듯 이뤄져 온 배제를 확인시켰다. 경기도는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차별을 시정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끝내 따르지 않았다. 정부가 위기가구를 대상으로 마련한 긴급생계비는 한국인 배우자·자녀가 없으면 받지 못한다. 초·중학생 아동특별돌봄지원금 역시 외국인 학생이 배제됐다가, 논란 뒤에야 일부 지역 교육청이 자체 예산으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차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한숙)이다. 외국인노동자의 일자리 취약성 문제도 외곽에서 맴돌고 있다.

국가인권기본계획에 명시된 불법체류 외국인 단속과정에서의 인권보호, 난민인정 심사절차 제도 등의 후퇴는 여실히 드러났다. 2년 전 ‘제주 예멘 난민 사태’, 지난해 미등록체류자 단속 과정에서의 이주노동자 사망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주노동자 사망 당시 법무부는 관련자 징계 및 재발방지책을 촉구한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 법무부가 코로나19에 대비해 내놓은 ‘불법체류 외국인 관리 방안’은 사실상 추방계획이나 마찬가지라는 빈축을 샀다.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인 ‘이민청’ 설립은 표류 중이다. 여당이 21대 총선 직전 ‘법무부 산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를 이민청으로 격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으로 알려졌으나 조용히 사라졌다. 이 소장은 “외국인정책기본계획, 예산 자체가 다 깎였다. 모든 면에서 지원정책이 줄었다. 이주민 비율이 4%를 넘어 5%로 가고 있는데 장기적 비전, 논의 자체가 없다”며 “이주민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게 1980년대 후반이고 30년 지났다. 여태 진행된 정책에 대해 비판적 검토, 새로운 방향을 설립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촉구했다.

▲ 130주년 세계노동절을 닷새 앞둔 2020년 4월26일 이주노동자 단체와 민주노총 회원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민 보호와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130주년 세계노동절을 닷새 앞둔 2020년 4월26일 이주노동자 단체와 민주노총 회원들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민 보호와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외면 속에서도 소수자성·정체성이 차별의 이유가 돼선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싹트고 있다. 지난 6월 국가인권위는 응답자 88.5%가 평등권 보장을 위한 법률 제정에 찬성했다는 ‘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코로나19라는 무차별적 재난 속에서 차별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인권위는 차별금지를 위한 ‘평등법’ 시안을 공개했다.

하지만 정부의 후속 조치는 없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지난달 국회에 출석해 “차별금지법은 필요한 법”이라고 밝혔지만, 그 역시 “찬성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애써 선을 그었다.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고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4년 째 반복되는 모습이다. 차별금지 관련 정부의 입법 시도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법무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종걸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장은 “소수자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적극 옹호하고 개선하려는 걸 보여야 사회적으로 논의가 확장되는데 어느 누구도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지 않고 뭔가를 (당사자 등이) 해주길 바라고 있다. ‘사회적 여론’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성소수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매번 비난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혐오는 과대표되고 소수자는 보이지 않는 사회, 기본권에 대한 고민이 멈춘 정부의 그늘은 일련의 집회·시위 규제에서도 드러났다.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보수·개신교단체 집회를 전면 금지하고 서울 광화문 일대를 차벽으로 둘러쌌다. 문재인 대통령은 관련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경찰도 방역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과 고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쌓아온 집회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는 우려는 깊은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편가르기식 정쟁으로 사안이 소비됐다.

심지어 이병훈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고의로 감염병 검사·치료 등을 거부하는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는 테러방지법 개정안을 냈다. 김남국·김승원·김용민·신정훈·양경숙·장경태·장철민·정청래·주철현·홍성국 의원이 공동발의했다. 박근혜 정부의 테러방지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필리버스터를 통해 저지했던 민주당이다. “감염병 확산 공포에 편승해 아무 거리낌 없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려는 발상”(참여연대)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법안은 철회되지 않았다. 앞서 국회가 집회·시위 장소를 제한하는 집시법 조항을 유지한 점에 대해서도 인권·시민단체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집회의 자유 역시 대선 후보 시절부터 문 대통령이 강조한 주요 가치다.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경찰·국정원 등 국가권력기관에 의한 폭력이 심한 시기였고, 현 정부에서는 집회·시위 관련 노골적 탄압이 없었던 것 같다. 분명히 다른 점은 있다”면서도 “최근 코로나19 관련해 정부·여당이 집회·시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기본권 보장에 대한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거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집회 현장 통제를 폭력이 아닌 형태로 관리하는 정도로 바뀐 듯 하다”는 평가다.

이어 그는 “집권 여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현 정부는 이전 정권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선긋기나 적폐청산 의지가 강했다. 이전 정권에 대한 진상조사와 적폐청산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들은 다르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는 측면이 있는데, 정권 4년차가 되어가는 시점에도 거기에만 매여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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