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국정감사에서 삼성전자의 중소기업 기술탈취 의혹을 제기했다. 류 의원은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액정에 기포 없이 필름을 붙일 수 있는 중소기업의 기술을 다른 협력 업체에 빼돌렸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를 부인하자 삼성 측의 기술탈취 정황을 담은 협력 업체 관계자의 녹취록을 제시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착잡하다”고까지 말했다.

앞서 류 의원은 지난 7일 삼성전자 임원이 기자를 사칭해 국회를 상시 출입한 것을 폭로했다. 삼성전자 임원이라는 외부인이 의원회관을 출입하려면 방문 의원실의 확인이 필요한데도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출입했고, 경위를 알아보니 정체가 불분명한 언론사 소속 기자로 등록해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성은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문제가 된 임원이 사의를 표명해 수리했다고 밝혔다. 삼성의 기술탈취 의혹과 기자 사칭 국회 출입 문제는 한국 사회 삼성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류 의원이 기술탈취 의혹을 따지기 위해 주은기 삼성전자 부사장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증인 채택 이후 삼성전자 임원은 기자를 사칭해 “매일 같이” 찾아왔다고 한다. 결국 주은기 부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일이 철회되는 일이 벌어졌다. 삼성 기술탈취 의혹의 파장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삼성이 로비를 벌였고 주은기 부사장 증인 채택 무산이라는 결과를 놓고 봤을 때 로비가 통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류 의원이 관련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관례라는 이름 아래 삼성 임원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로비를 벌이고, 이미 합의됐던 증인 채택이 무산되는 ‘삼성의 국회 우롱 사태’를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크다.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10월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2020년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10월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2020년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삼성 앞에서 작아지는 것은 국회뿐 아니라 언론도 마찬가지다. 사기업 임원이 버젓이 기자를 사칭한 사실 자체가 언론을 기만하는 행위인데도 전체 언론 보도를 보면 그다지 분노한 것 같지 않다. 지난 6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삼성전자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삼성 위기’라는 보도 제목까지 정해준 일이 드러나는 등 삼성의 ‘치밀한’ 언론관리 실태가 도마 위에 올랐을 때도 조용히 넘어갔던 걸 돌이켜보면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삼성의 기술탈취 의혹은 그동안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했던 불공정 이슈와 맞닿아있고, 증인 채택 무산 문제는 삼성의 국회 로비가 통한 이해관계 문제일 수 있는데 자세한 보도를 찾긴 어렵다. 삼성 측 임원이 어떻게 정체불명의 언론사 기자로 등록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불법은 없는지 여야 합의로 채택된 삼성전자 부사장 증인 채택이 어떤 이유로 무산됐는지 밝히는 게 당연하지만 주요 언론에선 ‘기술 탈취’라는 말도 찾기 어렵다.

지난 7일 류 의원이 기자 사칭 문제를 폭로하고 다음날 8일 국감에서 기술탈취 의혹을 제기한 일련의 삼성 관련 문제를 다루고 있는 주요 일간지 보도는 놀랍게도 10건에 그쳤다.

이 와중에 “원피스, 운동화, 점프슈트까지”라며 류 의원이 7일 국감과 8일 긴급의원총회에 입고 나온 옷차림을 부각한 보도는 생뚱맞다 못해 언론의 자기 존재에 물음표를 달게 한다.

▲ 삼성 깃발. ⓒ 연합뉴스
▲ 삼성 깃발. ⓒ 연합뉴스

삼성 앞에서만 작아지는 현상이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라지만 ‘삼성 앞에 언론은 없다’는 지경까지 온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국내 최대 기업의 불법과 관행에 눈 감은 채 언론의 신뢰도를 말하면 무엇하나. ‘삼성제품 광고지’라는 굴욕의 타이틀을 벗으려는 노력과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 우리 ‘언론’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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