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는 많다. 그러나 저널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언어활동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자와 사진으로 된 기사, 음성과 현장음으로 전달되는 라디오 뉴스, 영상과 리포트가 들어간 텔레비전 뉴스 등 저널리즘은 인간의 언어활동으로 표출된다. 이런 점에서 기자는 독자를 대상으로 말과 문자로 글을 쓰는 작가다.

문학사에서 작가는 시대마다 다른 독자들을 마주했다. 그러나 문학이론이나 비평의 소재는 주로 작품이나 작가에 맞추어져 있었지 이들과 독자가 맺는 관계에 주목한 경우는 드물다. 발터 벤야민은 1939년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라는 글에서 흥미로운 비교를 한다. 어느 때보다 작가들이 두려움과 매혹으로 대했던 19세기 대중을 향한 엥겔스와 보들레르의 시선이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1845)에서 런던 같은 대도시에 왔을 때 시골농부가 처음 접한 시선으로 대중을 묘사한다. “문명의 기적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희생”시키는 사람들, “동일한 특성과 능력,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닌 이들”이지만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서로 치닫듯 스쳐 지나가고”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작은 공간으로 밀집해서 밀어닥칠수록 잔인한 무관심, 즉 자신의 사적인 관심사에만 무감각하게 고립되는” 개인들의 집합, 곧 군중이었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엥겔스가 1845년에 느꼈던 런던 군중의 이미지는 오늘날 언론인들이 인터넷과 광장에서 마주하는 대중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수천만 이용자를 만날 수 있다는 “문명의 기적” 인터넷 속에서 포털과 언론사 홈페이지라는 “작은 공간으로 밀집하여 사적인 관심사에만 무감각하게 고립”된 채 대화 없는 비난과 분노로 충만한 익명의 대중은 아닌가. 기사 아래 수 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이메일의 받은 편지함에 알람이 수십 개 뜰 때, 기자에게는 반가운 반응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온다. 이러한 반응을 다루는 방법은 언론사나 기자에게 익숙하지 않다. 전화 항의나 절독이라는 반응만을 접했던 이들에게 때로는 욕설과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익명의 대중은 엥겔스처럼 자신이 속하지 않은 군중, “잔인한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자신을 대의하는 정치인이 아닌 자신이 대의해야 할 정치인을 지키려는 팬덤으로 다가오고 있다.

벤야민은 엥겔스의 시선에 보들레르의 그것을 비교한다. 『파리의 우울』(1862)의 산문시에서 보들레르는 대중을 엥겔스와 같이 외부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을 등장시켰다. “대도시 군중이 끌어당기는 힘에 굴복하여 그들과 함께 한 명의 거리 산보자가 되었지만 그러한 군중의 비인간적 속성에 대한 느낌”을 간직한 인물, “자신을 공범자로 만듦과 거의 동시에 그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대도시 시민이 자세히 묘사되지도, 도시의 풍경이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예컨대 그는 빈틈없이 밀집한 군중의 발걸음을 묘사하면서도 그 템포를 놓쳐 현실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노파의 모습을 함께 그려낸다. 때로는 대도시 소음에 대한 경탄이, 때로는 과격한 군중 행동을 향한 경멸의 시선이 중첩되기도 한다. 에드가 앨런 포우가 『군중 속의 남자』에서 상류계급, 귀족, 상인, 변호사, 주식투자가라는 경멸의 대상을 군중으로 삼고 이들과 함께 섞이면서도 거리두기를 반복하는 노인을 등장시킨 것이 보들레르의 관심을 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2016년 12월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 2016년 12월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보들레르의 군중은 오늘날 언론인들이 마주하는 대중의 양가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2016년 겨울 광장에 모였던 수백만의 시민들은 경이로움의 스펙터클로 다가왔지만, 바로 그 시민들이 이제는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언론’이라는 집합명사에 불신과 냉소를 보내고 있다. 올해 발의된 ‘징벌적 손해배상’을 향한 시민 다수의 지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찬성이나 반대를 표명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이를 지지하는 시민을 설득이나 주장의 외부 대상으로 삼지 않는 태도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규범적인 언어로 징벌적 손해배상의 문제를 놓고 다툴 때 언론인은 엥겔스와 같이 자신을 그들의 외부에 위치 지우게 된다. 보들레르라면 어땠을까. 자신 또한 누군가의 독자로서, 2016년 겨울 광장 안 시민이었지만 언론을 향한 불신을 만들어낸 공범자이자 냉정한 관찰자로 기사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저널리스트로서의 언론인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언론인의 시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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