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자락 그린빌딩으로 불리는 이곳. 출근시간이 되면 서울역, 회현역, 서울로(옛 서울역 고가)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출근길 가장 역동적인 풍경은 바로 통근버스다. 버스에는 출발지와 노선을 알리는 코드(bp250b, sy100, s300, b402, ds110, i20, gb100, p300 등)가 붙어 있다. 통근버스 십여대가 이곳 SK브로드밴드 본사를 경유하는데 버스마다 적게는 한명, 많게는 예닐곱이 내린다. 사무실과 먼 지역에 거주하는 직원들을 위해 SK그룹 차원에서 시행하는 복지제도다.

인천이나 수원에서 이곳 서울 도심까지 출퇴근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출근준비를 하고 여덟시 반께 이곳에 도착하려면 여섯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빨리 씻고, 대충 입고, 뭐라도 허겁지겁 먹고, 잠든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통근버스 출발장소로 달려야 한다. 한 시간 넘는 장거리 탑승에 유튜브 팟캐스트 게임을 하다 금세 곯아떨어질 거다. 버스에서 내리는 직원들의 표정은 밝지가 않다.

나와 비슷하다. 나는 이곳으로 출근한지 석 달이 조금 넘었다. 서울에 살아서 대중교통으로 출근을 하는데 도어 투 도어 한 시간 거리다. 여덟시께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여섯시께 일어나야 한다. 뭉그적거리다가 겨우 일어나서, 과일쥬스를 해 마시고, 빨리 씻고, 대충 걸쳐 입고, 아내와 고양이 동생들이 쿨쿨 자는 모습을 보며 나선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꽤나 압박이다. 아침에 청소하고 집안일을 하고 샤워를 하는 루틴이 깨지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사람에 치이고 나면 아침부터 화가 나고 피곤하고, 아침부터 피곤하니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고, 집에 돌아와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준다. 체력과 행복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도 견딘다. 다들 이 정도는 감내하면서 밥벌이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요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갉아 넣는, 하루하루 소모되는, 각박하고 피곤한 삶을 산다. (아주 조금 비약하자면) 가장 큰 행복이 쇼핑과 언박싱이고, 운동과 취미는 삶을 쪼개고 쪼개야 가능하고,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기도 힘든, 고민이라고는 재테크뿐인 그런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돼버린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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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브로드밴드 본사가 있는 SK남산빌딩(그린빌딩). 사진=정운.

SK는 그나마 낫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대우를 약속하고, 멀리 사는 직원들을 위해 통근버스를 보내고, 입구부터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노동조합은 회사에 교섭권을 위임하고… SK브로드밴드 정규직이라면 서울 도심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 수 있다. 지겹고 피곤한 통근버스를 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 같다.

더구나 SK는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기업철학을 제시한 기업 아닌가. 최근에는 그룹회장인 최태원씨가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같은 숫자로만 우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상의 공감과 감수성”을 설파했다. 두어 달 전 펴낸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SK는 “이해관계를 포함한 지속가능한 행복을 추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대단하다.

그런데 반전. SK는 정규직이라는 이너써클 안에서만 그렇다. SK는 재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자본이다. 거꾸로 말해 가장 많은 영역, 가장 많은 노동자를 외주화했다는 것이다. SK는 이너써클을 관리하기 위해 업계 최고 연봉과 통근버스를 내어주며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가장 밑단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생산성의 논리만 들이댄다.

잔인하다. 케이블방송을 설치수리하고 가입자망을 유지관리하는 기술센터 운영을 외주화한 것도 모자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행위에 눈을 감는다. 전주기술센터 노동자 여섯명은 지난 7월부터 전주에서 천안, 아산, 세종으로 출근하고 있다. 출근하려고 운전 두 시간, 온종일 운전하며 고객을 찾아다니고, 지붕과 옥상과 지하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고, 고객들을 만나 감정을 소진한다. 그 지친 몸을 끌고 또다시 두 시간을 운전해 퇴근을 한다. 9to6 말고 매일 6to9이다. 250만원 수준의 월급마저 30~40만원 삭감당한 채로 말이다. 전보조치 석 달, 우리 조합원 여섯명의 일상은 완전 뒤틀려버렸다. 저녁도 아침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삶을 산다. 

상식적으로 부당전보이고, 회사를 그만 두라며 노동자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이다. 일 년마다 원하청 계약이 이루어지고 사업권역이 달라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원상복귀가 아예 불가능한 부당전출이다. 250만원짜리 노동자를 한명이라도 잘라내 그만큼의 이익을 중간에서 챙기려는 구조조정이다. SK브로드밴드가 티브로드를 합병했을 때 노동조합이 몇 달을 싸워 얻어낸 ‘합병 승인 조건(협력업체 종사자의 고용안정과 복지 향상)’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SK브로드밴드는 그것이 “정당한 인사권”이라는 입장이다. 해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용유지’ 조건을 어긴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승인 조건 이행계획은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틴다. “협력업체 노사관계에 개입할 수 없다”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본사 앞에서 피케팅을 한지 석 달이 지났고, 기자회견도 집회도 했지만 SK 입장은 똑같았다. 한마디로 부당전보, 구조조정을 방조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IPTV는 자회사, 케이블방송은 하청업체’에 맡기는 기형적인 고용구조를 방치하겠다는 것이다. 월급 250만원짜리 노동자를 구조조정하는 것이 SK브로드밴드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이 SK식 외주화와 생산성이다.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경영철학과 방식은 비정규직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을 품는다. 다음 주 월요일(9월28일) 변곡점이 생긴다. 지방노동위원회의 판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당전보라는 판단이 나오길 바라고, 회사는 지노위 판단을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다면? SK는 과연 어떨까. “협력업체 인사 문제이기 때문에 원청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한다고 하니 그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더 크다. 우려하는 대로 회사와 SK의 입장이 나온다면 우리는 더 독한 싸움을 해야 한다. 진짜사장 SK를 상대로 말이다. 모든 것을 뺏어갔으니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고작 출근피케팅에 힘들다고 징징댈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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