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게이 촬영 스태프입니다. 현장에서 혐오표현을 들으면 다들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FTM(Female To male·트랜스남성) 비수술 트랜스젠더 스태프입니다. 가슴 압박 셔츠를 입어야 하는 여름 현장은 너무 힘들고, 지역 출장은 엄두도 못 내니 경력이 제자리입니다. 제 능력만큼 인정받는 현장, 가능할까요?”

성소수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성소수자를 차별·배제하지 않는 방송 제작 현장을 고민하는 집담회를 열었다.

성소수자 방송·미디어노동자 인권을 위한 캠페인 ‘스탠바이큐’ 기획단(이하 스탠바이큐)은 25일 저녁 7시 서울 이태원의 식당 ‘마이 첼시’에서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를 진행했다.

▲성소수자 방송·미디어노동자 인권을 위한 캠페인 ‘스탠바이큐’ 기획단(이하 스탠바이큐)은 25일 저녁 7시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를 진행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성소수자 방송·미디어노동자 인권을 위한 캠페인 ‘스탠바이큐’ 기획단(이하 스탠바이큐)은 25일 저녁 7시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를 진행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스탠바이큐는 성소수자 미디어노동자 운동의 일환으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이달부터 시작했다. 행사장 ‘마이첼시’는 방송인 홍석천씨가 운영한 가게로 최근 폐업됐다. 홍씨는 20년 전 연예계에서 최초로 커밍아웃을 해 한국 사회 변화를 낳는 단초가 된 이다.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씨가 진행을 맡았다. 홍석천씨와 래퍼 슬릭씨,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이혁상 영화감독이 패널로 나왔다. 2010년 커밍아웃을 한 이혁상 감독은 2011년 퀴어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을 찍었다.

집담회 1부 ‘나도 그랬어’ 코너에선 당사자 스태프들로부터 제보받은 현장 고충을 다뤘다. 자신을 30대 초반 게이라고 밝힌 한 스태프는 “주변에서 ‘동성연애자’가 어쩌고, ‘게이가 싫다’ 등의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언짢아 화를 내면 상대는 별일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핀잔을 준다. 괜히 화냈나 싶고, 혹시 날 알아볼까봐 걱정됐다”고 밝혔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대응하시냐”는 이 스태프 질문에 이혁상 감독은 과거 당혹스러웠던 경험담을 공유했다. “왜 동성애 영화를 찍으세요?”라는 질문에 대해서였다. 한 시나리오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다른 심사위원이 동성애를 다룬 시나리오를 제출한 면접자에게 이리 물었다. 이 감독은 “남녀가 만나는 이성애 영화엔 ‘왜 이성애 영화를 만드세요?’란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때 이 말과 함께 ‘저 게이인데, 왜 하면 안되죠?’라고 말하며 상황을 풀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커밍아웃 경우)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커밍아웃을 하면 불이익, 차별을 받는 위치가 있다. 조금 더 기다리면서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그룹에서 누군가 그런 말에 상처받을 수 있으니 생각 좀 하고 얘기해달라’고 말하면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자신을 트랜스남성이라 밝힌 스태프는 현장에서 정체성을 숨기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수술 전이라 가슴을 압박하는 셔츠를 입는데, 폭염이 찌는 여름엔 너무 힘들고 누군가 가슴을 보지 않을지 항상 긴장한다고 밝혔다. 그는 “원거리 출장을 가기 힘들어 경력이 제자리다. 빨리 돈을 벌어 수술을 받고 싶은데 경력이 늘지 않아 조바심이 난다”고 밝혔다.

홍씨는 “참 정답이 없는 문제”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해나가고 싶다면 감독, 제작자같은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나 어느 누군가에게 고충을 토로하는 용기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즘은 이성애자 스태프 중에도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작자협회같은 기관·단체가 이런 이슈를 다뤄야 하는지 교육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 패널로 참가한 홍석천씨. 사진=손가영 기자.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 패널로 참가한 홍석천씨. 사진=손가영 기자.

손희정 평론가는 이에 “동료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며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야 한다. 드러내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으니”라고 말했다.

넷플릭스의 다양성 가이드라인은 좋은 사례로 지적됐다. 이 감독은 “우연히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드라마 대본을 봤는데, 첫 장을 넘기자 마자 ‘혹시 당신이 트랜지션(transition) 과정에 있다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고 말했다. 트랜지션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게 사회적 성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이 감독은 ”현장은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바뀐다. ‘LGBTQ 프렌들리’한 현장을 위해선 구성원 교육이 중요한데, 스탠바이큐를 만든 이유기도 하다“며 ”문제는 (가이드라인이 있다해도) 한국 현장에 얼마나 적용되겠느냐지만, 가이드라인이 있다는 것에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고 밝혔다.

고용부터 작품 내용까지 ‘쿼터제’로 소수자 존재 드러내자

이어진 2부에선 패널들에게 성소수자를 차별·배제하지 않는 제작 환경을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패널들은 “더 많은 커밍아웃이 필요하고, 제작·고용에서의 ‘소수자 쿼터제’도 방법이 되며, 위계질서를 타파하자”고 답했다.

“더 많은 커밍아웃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혁상 감독은 “현장에 성소수자들이 많이 있다. 어렵겠지만 '자신의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다면' 커밍아웃을 하면 좋겠다. 홍석천씨가 했던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에서 제작한 피켓 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에서 제작한 피켓 사진. 사진=손가영 기자.
▲행사 말미엔 홍석천씨와 이혁상 감독의 커밍아웃을 기념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홍씨는 정확히 20년 전인 2000년 9월26일 처음 커밍아웃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행사 말미엔 홍석천씨와 이혁상 감독의 커밍아웃을 기념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홍씨는 정확히 20년 전인 2000년 9월26일 처음 커밍아웃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홍씨는 “외국에선 이미 하고 있다”며 쿼터제를 강조했다.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이달 신설한 다양성 규정이 쿼터제 예다. 이 기관은 ‘출연진’, ‘제작진’, ‘영화 산업 진입 기회’, ‘마케팅 및 홍보’ 등 4가지 영역을 분류해 이 중 2개는 반드시 다양성 기준을 충족해야 2024년부터 작품상 후보에 이를 수 있다고 정했다. 출연진 기준 경우, 주연 중 적어도 한 명은 다인종·민족 출신이거나 조연·단역의 최소 30% 이상이 다인종·여성·성소수자·장애인 중 둘 이상이어야 통과된다.

슬릭씨는 “차별·혐오를 말로 드러낼 수 있는 건 권력 때문이다. ‘내가 말해도 되니까’ 말하는 것”이라며 “생각은 막지 못해도 표현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이 행동을 뒷받침하는 위계질서가 없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행사 말미엔 홍씨와 이 감독의 커밍아웃을 기념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홍씨는 정확히 20년 전인 2000년 9월26일 처음 커밍아웃했다. 그는 자신에게 “건강하게 잘 버텼다. 앞으로도 열심히 잘 버텨볼테니 힘이 돼달라”며 “마지막 가게에서 뜻깊은 방송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눈물도 보였다.

손 평론가는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당사자에게 말을 잘못해서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지식의 양보다 중요한 건 태도와 마음”이라며 “진심으로 다가가면 실수를 했더라도 서로 ‘그건 아니’라고 대화나눌 수 있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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