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실종 공무원 피격 사태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격 사과한 데 이어 남북 정상이 주고 받았던 친서가 공개됐다. 정상 간의 친서 전문이 공개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남북 관계가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겠다는 위안 섞인 반응들이 나오지만, 친서공개라는 정치적 결단에 비해 청와대 대응이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는 이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번 사태에 ‘미안한 마음’을 전한 통지문을 발표했고, 두 시간 만에 정상간 주고 받았던 친서를 공개했다. 오후 2시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 통지문을 발표하며 친서의 존재를 알렸던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4시 브리핑을 통해 “친서 교환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짐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최근 주고받은 친서 내용도 있는 그대로 모두 국민들에게 알려드리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지난 8일 문 대통령, 12일 김 위원장이 전한 친서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 서로에게 격려를 보내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김 위원장은 이 친서에서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있는 남녘과 그것을 함께 나누고 언제나 함께 하고싶은 나의 진심을 전해드린다”며 “끔찍한 올해의 이 시간들이 속히 흘러가고 좋은 일들이 차례로 기다릴 그런 날들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문 대통령에게 전했다.

▲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남북한 정상 친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남북한 정상 친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는 그간 남북 정상의 상호 신뢰가 유지돼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속한 사과가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북측은 통지문에서 “우리 지도부는 이와 같은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최근에 적게나마 쌓아온 북남 사이의 신뢰와 존중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게 더욱 긴장하고 각성하며, 필요한 안전 대책을 강구할 데 대하여 거듭 강조했다”고 전했다. 실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24일 오후 3시께 북한에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김 위원장이 사과를 전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이렇게 빠른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분위기다.

다만 통지문에는 우리 군의 설명과 어긋나는 부분들도 담겼다. 우선 실종됐던 공무원 A씨가 ‘월북 의사’를 밝혔음에도 사살됐다고 알려졌으나, 북측은 “정체불명의 인원” “불법침입자”라고 A씨를 칭했다. 또한 A씨 시신이 불태워져 훼손됐다던 발표와 달리 북측은 “우리 군인들에 의해 사살(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을 국가비상방역 규정에 따라 해상 현지에서 소각했다고 했다. A씨가 지속적으로 단속명령에 응하지 않아 해상경계근무 규정에 따라 40~50m 거리에서 사격했고, 이후 움직임이 없어 확인했더니 침입자는 없고 혈흔만 남아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별도의 해석이나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한 질의응답에서 “이 통지문에 대해서 정부가 어떤 판단을 하고 있다는 걸 예단하지 마시고 있는 글자 그대로 판단해 달라”고 답했다. 북측의 통지문이 진상규명 등 요구를 충족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이 관계자는 “필요한 부분과 추가적으로 어떤 대책과 준비를 취할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청와대는 줄곧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최근 이틀 청와대에서 진행된 브리핑은 총 5회다. 먼저 2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북측에 진상규과 책임자 엄중처벌을 요구했고, 정만호 국민소통수석은 문 대통령이 이번 사태에 대해 몇시 몇분 몇차례 보고를 받았는지 밝혔다. 25일엔 문 대통령이 북한 당국에 책임 있는 답변·조치를 요구하고 군의 경계태세 강화를 지시했다는 강민석 대변인 브리핑, 이후로는 김정은 위원장 통지문 및 친서공개 발표가 이어졌다. 결국 현 시점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청와대의 판단, 향후 계획이나 대처 방향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25일 오전 제72주년 국군의날 기념사에서도 북한 관련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실장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서훈 실장이 어떻게 해석하고 조치할지 기다려달라고 했고, 이후 2차 브리핑에서 친서를 공개했다. 두 번째 브리핑에서는 통지문에 대한 우리 측의 해석이 나오는 차례가 맞지 않나. ‘친서공개’가 청와대 의중인 것이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윤 실장은 “처음 관련 브리핑을 했던 건 합참이고, 오늘 국회에서 장관들이 답변을 했다. 이에 대한 총괄 책임이 불분명하다”며 “합참의 구체적인 발표 뒤에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책임 있는 대응을 하는 게 맞다. 밝힐 건 밝히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가르마’가 타져야 하는데 여론의 추이를 보겠다는 식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친여권 진영에서는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노무현재단 유튜브로 생중계된 ‘10·4 선언 13주년 기념행사’ 토론회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이 불행한 사건에 북측 통지문으로 충분하다 볼수는 없지만 실마리가 돼 남북 정상이 우선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유명을 달리한 A씨와 가족들에게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전화위복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놨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의 지시에 의했거나 이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 25일 제72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 25일 제72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미디어오늘에 “남북 정상 소통 자체를 확인한 건 긍정적일 수 있지만 지나치게 과잉해석은 조심해야 할 거 같다”며 “정상 사이 친서가 오고 간 걸 확인하긴 했지만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남북 소통 채널이 차단되면 야기될 수 있는 참사를 보여준 부분이 있다. 북한의 과잉대응 자체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정부나 군의 안일한 태도 첩보 수준의 내용을 마치 확인된 사실처럼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나아가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인도적인 해결 원칙과 재발방지책이 남북 사이에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7년 북한군 병사 한 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순할 때도 총격전이 있었고, 2013년 남측 주민이 월북을 시도하다 우리 군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들이 과거에도 반복됐고 지난번 9·19 군사합의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으니 차제에 확실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확실한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종대 정의당 한반도 평화본부장은 통화에서 “하여간 문재인 정부가 퍼포먼스에 강하다는 건 또 한번 실감한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으로 삼을 가능성이 커졌다”며 “(김 위원장) 사과는 진정성이 있다고 보지만 미흡한 해명이 있고 비무장 국민을 상대로 한 행위의 책임은 한 번의 사과로 마무리될 일은 아니다. 대국적 차원에서 더 많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방향으로 가야지 (사과했다고) 양해하는 식으로 잘못 관리돼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대통령의) 국군의날 기념사에서는 언급이 있어야 했다고 본다. 어떻게 한 마디도 안 할 수 있느냐”고도 덧붙였다.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내어 “북한이 통지문을 보내자마자 청와대에서 그간 오간 친서까지 난데없이 공개했다. 우리 국민이 무참히 짓밟힌 초유의 사태를 친서 한 장, 통지문 한 통으로 애써 덮고 ‘실수’였다고 편들어주려는 것인가”라며 “국민적 분노와 유가족의 슬픔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 없다. 북한의 사과는 너무나 미흡했고 국민들은 분노와 답답함에 괴로워한다”고 비판했다. 윤 대변인은 “안부 편지는 필요 없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책이 담긴 진심 어린 친서를 받아 오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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