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입사자 은행권의 ‘정유라’를 정리해 주십시오.” 지난 11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게시된 간곡한 호소다. 2018년 은행권 채용 비리 사건으로 범죄 피해자가 된 취업 준비생들의 절절한 사연이 담겼다. 청원인은 “좋은 스펙도 ‘좋은 부모’ 앞에선 무용지물”이라며 “채용비리는 ‘하면 된다’는 믿음을 비웃고, 모든 노력을 가치 없게 만든다.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채용된, 은행권의 부정 입사자들을 정리해달라”고 호소했다. 청원인은 은행 채용비리 부정 입사자 조사 및 징계 의무화와 채용비리 재발 방지를 위한 ‘채용비리 처벌특례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은행권 취업 준비생들이 이처럼 분노한 이유는 탐사보도 매체 ‘셜록’의 기사를 통해 쉽게 확인된다. 셜록은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은행권의 ‘정유라’ 그들은 왜 당당한가”라는 제목의 기획을 네 차례 연속 보도했다. 신한은행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 관여하고 점수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1심 판결을 중심으로 관련 판결문과 자료 검토·조사한 결과물이다. 셜록 이명선·김보경 기자의 보도다.

▲ 셜록의 이명선·김보경 기자는 은행권 부정 입사자와 그 책임자들을 쫓고 있다. ‘은행권 정유라’를 추적하고 있다. 사진=셜록.
▲ 셜록의 이명선·김보경 기자는 은행권 부정 입사자와 그 책임자들을 쫓고 있다. ‘은행권 정유라’를 추적하고 있다. 사진=셜록.

이명선 기자는 21일 통화에서 “채용비리 사건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데, 초기 검찰 수사 때 외에는 제대로 보도가 안 됐다”며 “판결문을 중심으로 사건을 구성해보고, 부정 채용자들이 지금도 신한은행을 다니고 있는지 추적하는 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를 테면 신한은행의 2015년 상반기 신규행원 채용에선 금융감독원 임원의 아들이 면접에서 낙방 수준인 ‘DD등급’을 받았음에도 조 회장(당시 신한은행 행장) 지시에 따라 확정된 성적이 합격선으로 껑충 뛰었고, 법원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합격하지 않은 지원자”라고 명명했음에도 해당 임원의 아들은 지금도 신한은행 재직 중이다. 1심 판결에서 징역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조 회장은 지난 3월 신한금융지주 회장 연임에 성공했다. 라응찬 전 신한은행장의 조카손자도 1단계 서류전형에서 불합격권이었지만 조 회장을 거쳐 최종 합격했다. 신한은행은 임원 면접 때 라응찬 전 행장의 조카손자를 위한 ‘전용 면접조’를 꾸리는 등 불공정 채용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명선 기자는 “1심 판결에서 확인되는 일부 신한은행 부정 입사자들은 자신들이 판결문에 등장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며 “은행업계의 이 같은 도덕적 해이에 문제 의식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부정 입사자들 다수는 “모르는 사실”, “아무 의견 없다”, “나한테 자꾸 묻지 말고 신한은행에 정식으로 물어 보시라” 등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 기자는 “신한은행은 이른바 금융권 고위 인사들의 자녀 등을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 명단 리스트로 만들어 관리했는데, 그 ‘비고’란을 보면 부정 채용을 통해 향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다”며 “실제 그로 인해 어떤 이익을 얻었는가, 이 부분은 더 파헤쳐 봐야 할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보도 이후 은행권 비리 제보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의 경우 채용 비리 관련 항소심이 진행 중이고 하나은행은 1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 기자는 “재판이 진행되는 만큼 업계 관계자들의 관심이 매우 큰 상황”이라며 “취재를 하다보면 업계로부터 ‘기사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은행이 (셜록 보도를 밀어내기 위해) 보도자료 뿌릴 시점을 가늠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 셜록은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은행권의 ‘정유라’ 그들은 왜 당당한가”라는 제목의 기획을 네 차례 연속 보도했다. 신한은행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 관여하고 점수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1심 판결을 중심으로 관련 판결문과 자료 검토·조사한 결과물이다. 사진=셜록 유튜브 화면 갈무리.
▲ 셜록은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은행권의 ‘정유라’ 그들은 왜 당당한가”라는 제목의 기획을 네 차례 연속 보도했다. 신한은행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 관여하고 점수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1심 판결을 중심으로 관련 판결문과 자료 검토·조사한 결과물이다. 사진=셜록 유튜브 화면 갈무리.

이 기자는 언론 보도에도 문제 의식이 있다. “채용 비리와 관련 검찰 수사 당시 흘러나온 정보 외에는 보도가 드문 상태다. 법조 기자들은 비실명 판결문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텐데 왜 기사에 은행 관계자들 이름이 적시되지 않는지 의문이다. 추후 보도하겠지만, 언론의 침묵은 광고와 연관돼 있다는 판단이다. 기성 언론은 은행권 광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 같은 대안 언론은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책임자 처벌은 미진하다. 전국은행연합회는 채용 절차 공정성을 강화한다며 2018년 6월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을 만들었다. “지원자가 부정한 채용청탁을 통해 합격한 사실이 확인된 경우 은행은 해당 합격자의 채용을 취소 또는 면직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 이행되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 기자는 “현재 채용 비리가 벌어져도 인사 책임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조항은 사실상 ‘업무방해’ 외엔 없다”며 “직접적 조항은 없는 것인데 류호정 정의당 의원을 포함한 젊은 의원들은 채용 비리를 바로잡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감독원은 채용에 대한 매뉴얼을 제정하고, 블라인드 채용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감시할 책임이 있다”며 “그러나 금감원 고위 임원 자녀들도 청탁을 통해 은행에 입사한 사례들이 확인되는 상황인 데다가 미약한 사후 처벌에만 그치고 있다. 이 부분에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은행들이 2020년 하반기 신입행원 공채에 나서고 있다. 당장 취업에 사활을 건 준비생들은 공채가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쩌면 알면서 속는 셈 치고, 면접장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채용 비리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또다시 피해를 입는다. 이 기자는 “20대들이 분노할 기사이지만, 그들 20대는 당장에 닥친 취업에 몰두하느라 ‘비리 근절’ 목소리를 한데 모으기 어렵다. 결국 언론이 감시하지 않는다면, 비리는 또다시 벌어질 수 있다. 은행들이 주요 인사들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셜록은 더 적극적으로 채용 비리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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