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좋다”고들 말한다. 그릇이 큰 사람은 그렇게 대범하게 처신한다는 게 우리의 전통처럼 돼 있다. 소위 ‘중도(中道)’를 걷는 사람이다.

430년전인 선조 2년(1569) 윤 6월 초엿새 경연(經蓮)에서 좌승지였던 고봉 기대승(高奉 奇大升·1527~1572년)은 ‘논어’를 진강(進講)하면서 말했다.

“근래에는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하게 치니 사람들이 어찌 중도를 배우려하지 않겠습니까. …과격하지 않은 것이 ‘중(中)’이 아니라, 일의 당연한 것이 ‘중’입니다. 모든 일은 ‘평범하게’ 해야한다고들 말하지만, 군자에게 후하고 소인에게 박하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임금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를 게을리하면 간산한 무리들이 은연중에 모함하기를 ‘과격하다’거나 ‘말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227년뒤 정조(正祖)가 ‘괴격(乖激)한 언론’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세상의 사대부들이 남을 따라가는 것으로 처세를 삼는 한심한 세태에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을 돌보지 않고 괴격하여 변치않는 사람”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고 했다.

정조는 또 “정사(政事)에 이견이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 한 사람이 주장하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능사로 사믄다”고 신하들을 비판했다.

‘괴격하다’는 것은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임금에게 필요한 것은 만인에게 영합하는 팔방미인이 아니라, ‘이견’이 있고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에는 만인에게 영합하는 무골호인과 대칭적인 ‘양비론’이라는 독특한 화법(話法)이 있다. “좋은 게 좋다”가 아니라 “모두가 나쁘다”는 화법이다.

양비론이 등장한 것은 유신정권·전두환정권의 폭력·공포통치시대의 일이었다. 그것은 ‘비판’이라는 기본적 직무를 포기하지 않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본질적인 문제에는 침묵을 지키는 화법이다. 또 ‘산술평균식 중립’으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모양새도 잃지 않는 편리한 화법이다.

양비론은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금도 이 나라의 언론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언론은 모두가 유행가의 인기곡을 불어대는 나팔수가 됐다. 문제의 본질적인 판단보다는 산술평균식 중립의 모양새를 갖추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태도다. 국회본관 529호실 사건으로 폭발한 소위 ‘정치사찰’ 시비를 보자.

원래 정치사찰과 정보수집은 내용이 다른 딴판이었다.
유신정권이후 역대 군사정권들은 초법적이고 불법적인 밀착감시를 통해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야당과 저항운동을 탄압했다. 그것은 정보수집이 아니라, 거의 공개적인 협박행위였다. 정치사찰은 폭압정치 특유의 산물이다. 정보수집과는 다른 차원의 탄압수단이요, 협박이다.

적법한 방법에 의한 정보수집은 서방각국의 민주체제하에서도 보편적인 공공활동의 하나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고위직후보자가 정보자료의 검토를 거쳐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국회 본관 529호실 사건이후 폭발한 소위 ‘정치사찰’ 공방은 출발부터 잘못된 논쟁이다.
문제삼을 것은 정보수집방법의 적법성여부이지, 정보수집 자체가 아니다.

다만 안기부법에 의해 규정된 정상적 업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하는 문제는 제기될 수 있다.
여·야 의원의 동태파악이 “남북분단현실에서 불가피한 정보수집”이라는 설명이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닌가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안기부에 의한 ‘정보의 집중’을 완화할 필요성은 없는가.
미국에서 국내는 연방수사국(FBI)이 맡고 대외분야는 중앙정보국(CIA)이 맡는 것처럼 정보활동을 이원하는 방법이 바람직스런지, 가능한지 여부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정치사찰’ 공방은 이러한 본질적 인식이나 검토없이 ‘천하대란’의 상대가 됐다. 그 책임의 일정부분은 언론에게도 있다.

지금 언론에는 정부정책 비판도, 한나라당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없다. 때로는 약간의 모험이 필요한 양비론보다는 그 옛날의 ‘중도론’으로 돌아간 꼴이다.

한나라당은 “언론이 야당에 대해 공평치 않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언론은 과거 민주회복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전통야당에 주어진 프레미엄을 산술평균식 중립의 명분밑에 기득권세력인 한나라당에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바람 잘날 없었던 국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상태가 됐다. 언론이 정치적 평화를 위해 기여할 생각이라면 산술평균식 중립의 규칙을 버리고, 문제의 본질을 들어내는 ‘본질적 판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만 살피면서 인기곡만 불어대는 유행가의 나팔수 노릇을 포기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괴격한 언론’을 시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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