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고민을 했어요. ‘공익적 민영방송’이라는 포부를 갖고 내 청춘과 인생을 다 바친 회사…. OBS를 떠나기까지. 지난 10여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많은 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경인·인천 지역의 지상파 방송 OBS의 상징과 같았던 이훈기 전 ‘노조위원장’이 OBS를 떠났다. 사표는 지난 10일 수리됐다. 어깨 위 무거운 짐을 스스로 내려놨다. 그는 지난해 초 OBS 방송정책국장으로 IPTV 3사와의 재송신료 협상 타결을 주도했다. 이를 발판으로 OBS를 재도약시킬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협상 타결이라는 희소식에 반색할 틈도 없이 그가 OBS ‘인천총국’과 ‘의정부총국’으로 연달아 ‘좌천’됐다는 소식만 공허하게 전해졌다.

지난 16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만난 이훈기 전 위원장은 “OBS 대주주(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전횡을 견제하지 못했다. 나도 조직도 무력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를 느꼈다. 더 소모되기보다 좀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어렵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OBS 전신인 iTV 시절을 포함해 지난 2013년 전국언론노조 OBS희망조합지부장까지, 여섯 번이나 노조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OBS를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 이훈기 전 OBS노조위원장. 사진=이훈기 제공.
▲ 이훈기 전 OBS노조위원장. 사진=이훈기 제공.

2007년 개국한 OBS는 ‘특별한’ 방송사였다. 전신 격인 iTV는 △사업수행을 위한 재정능력 부족 △방송발전 지원계획 및 방송수익 사회 환원 불이행 △협찬·간접광고 규정 반복적 위반 등 이유로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재허가 추천을 거부받고 2004년 12월 ‘정파’됐다. 지상파 방송 정파는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정파 본질은 ‘방송의 사유화’였다.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그는 iTV 대주주 동양제철화학과 정치인 낙하산 사장에 맞서 2004년 44일 동안 ‘공익적 민영방송 쟁취’ 전면 파업을 주도했다. 정파 뒤에는 2년 반 회사 밖에서 풍찬노숙하며 ‘경인지역 새 방송’에 심혈을 기울였다. OBS 개국은 혼자만의 성과는 아니었다.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노동자, 노조가 똘똘 뭉쳤다. 경인지역 새 방송 설립 준비위원회가 모집한 발기인이 1만5000명에 달하는 등 수백 개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지지한 성과가 OBS 개국이었다. 최대주주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도 2007년 3월 보도자료를 통해 “‘소유와 경영 분리’를 통해 건강한 방송을 만들어 가겠다. 경인방송(OBS)은 공익적 민영방송”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어느 순간부터 대주주가 방송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노사의 건강한 상호 견제가 무너지며 무게중심이 확 자본으로 쏠렸다”며 “대표이사들은 소유와 경영 분리를 전혀 지켜내지 못했다. 인사권부터 주요 의사결정까지 모든 권한이 대주주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고 술회했다.

OBS가 도약할 기회는 크게 세 번 있었다. 2011년 3월 방통위의 ‘역외재송신’(지정된 권역 외의 지역에도 방송 송출), 출범 후 지지부진했던 종편과의 차별화를 통한 위상 제고, 지난해 IPTV 3사와의 재송신료 협상 등이다. 30억원대 재송신료는 분명 성과였으나 그는 이후 지역총국을 떠돌아야 하는 신세였다. 올해 초 의정부총국으로 발령은 낯설지 않았다. 4번째 의정부 발령이었다. 대주주에 맞서왔던 대가였을까.

이 전 위원장은 “지난해 재송신료 문제 해결은 새 도약의 터닝포인트였다”며 “이 성과를 기반으로, 조직과 인력을 쇄신하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했다. 또 OBS가 탄생하는 데 큰 힘을 되어준 지역 네트워크 구성원들과 함께 불합리한 방송제도 개선에 공력을 쏟아야 했다.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고 말했다.

지난 3월 OBS는 ‘언론사 세습’ 논란을 불렀다. OBS 이사회가 백 회장 아들인 백정수 영안모자 부회장을 신임 이사회 의장에 선임해서다. OBS노조는 “백성학 회장에서 아들인 백정수 부회장으로 이사회 의장을 바꾸는 것이 언론사 세습이라는 비판을 들어도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전 위원장은 “방송사 부자 세습은 부끄럽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훈기 전 OBS노조위원장. 사진=이훈기 제공.
▲ 이훈기 전 OBS노조위원장. 사진=이훈기 제공.

그는 “민영방송은 대주주 입김과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소유와 경영을 분명히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iTV 정파를 계기로 방통위의 재허가가 강화됐다가 지금은 다시 느슨해졌다. 법과 원칙에 따른 재허가가 요구된다. 재허가를 통해 주주와 방송사 내부를 들여다보고,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조건 위반이 있다면 강력한 페널티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OBS뿐 아니다. SBS, 청주방송, 경기방송 등 최근 민영방송에서 불거지고 있는 문제에 대주주 전횡이 있다. 민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방송 공공성과 공익성을 보장할 수 없다.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하면 방송은 대주주 사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방통위는 지난해 12월 OBS에 조건부 재허가를 의결하면서 재허가 기간 중 콘텐츠 투자 등을 이행하지 않으면 재허가를 취소하기로 했다. 자본잠식 등 만성적 경영난을 겪고 있는 OBS가 재허가 조건을 이행할지, 이 전 위원장은 퇴사 신분에도 OBS를 걱정했다. OBS는 최근 △OBS 정체성 재정립 △일하는 조직으로 개편 △수익 다각화 등을 목표로 구조혁신을 단행키로 했는데, OBS 구성원들은 회사가 내놓은 구조혁신안이 구조조정 신호탄은 아닌지 우려한다. 전국언론노조와 OBS지부는 지난 16일 대주주 영안모자 계열사 노동자들과 ‘정리해고’에 맞서는 공동대응에 나섰다.

그는 당분간 쉬면서 OBS 개국에 힘이 되어준 ‘동지’들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그는 말했다. “iTV가 사라지고 2년 반 풍찬노숙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방송위에서 사업자 선정이 되고, 조합원 전원이 완전 고용에 합의한 일(2007년 4월)이다. 제대로 된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꿈, 희망이 있었던 때였다. 비록 회사를 떠났지만 후배들이 그 꿈을 이어주길, 소유와 경영 분리라는 목표를 이루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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