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주목을 받은 내부고발자들은 관심이 지나간 뒤 2차 가해에 놓이기 쉽다. 비난을 못 이겨 사과한 가해자들도 사태가 잦아들면 내부고발자를 법정에 불러들이곤 한다. ‘갑질’ 논란으로 물러난 미디어 스타트업 ‘셀레브’ 전직 대표 임상훈씨도 그런 경우다. 2년 전 전직 직원 A씨의 폭로 사흘 만에 공개 사과했던 임씨는 약 3주 뒤 A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1심 재판부는 A씨가 SNS 글에서 ‘가라오케’를 ‘룸살롱’이라 표현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벌금형을 선고했다.

‘가라오케를 룸살롱이라 한 죄’란 비판을 부른 재판의 항소심(2심)이 18일로 다가왔다. 페미니즘 프로젝트 그룹 ‘셰도우핀즈’와 공익제보센터 ‘굿로이어스’ 양태정 변호사는 A씨에 대한 무죄탄원인을 모으고 있다. 공동소송플랫폼 ‘화난사람들’에서 15일 기준 265명이 탄원인으로 참여했다. 항소심에 대한 긍정적 전망 한켠에서 A씨는 거액의 민사소송과 재판 과정에서의 2차가해를 마주하고 있다. 셰도우핀즈 활동가 테오즈·제로섬과 양 변호사를 14일 서울 굿로이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전원이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진행됐다.

테오즈는 “사건에 다시 한번 불씨를 붙이고 싶었다”고 공동탄원인 모집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사람들이 사건을 잊어버렸다. 임 전 대표가 사퇴하고 끝난 줄 안다. IT쪽 업계는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많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든 상황이라서, 피해자와 연대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바꿔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재판 승패도 중요하지만 업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유입될 텐데 이대로 가면 되겠냐는 것”이라 말했다.

앞서 A씨는 2018년 4월 페이스북에서 임씨의 ‘갑질’을 폭로했다. 임씨가 스타트업 유망주이자 ‘새 시대의 엘리트’로 소개된 즈음이다. 전년도에 퇴사한 상태였던 A씨는 셀레브에서의 장시간 근무, 공포 분위기, 여성 직원에 대한 비하와 욕설, 강압적 회식, 본인의 공황장애 진단 경험 등을 밝혔다. 본인이 직접 들은 욕설·폭언, 직원들로부터 들은 하소연 등을 함께 적은 내용이었다. 1심 판사에게 제출한 의견서에서 A씨 측은 “피의자(본인) 또한 잠시 셀레브의 인사업무 등 중간관리를 맡았던 자로서 강압적 분위기 하에 본인 및 직원들이 야근하도록 임상훈 의사에 따라 관리한 경우가 있었고 직원들에게 직접 부담을 줘야 하는 이러한 업무 역시 피의자가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게시글 작성에 이른 요인 중 하나였다”고 했다. 주장을 뒷받침할 일부 직원들의 진술도 첨부했다.

▲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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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가 처음부터 A씨를 고소한 건 아니다. 관련 보도가 확산되자 임씨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했다. 당시 그는 페이스북에서 “글에 적힌 저는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핑계를 대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저의 모습을 돌아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다”고 밝혔다. A씨를 향해서도 “직접 만나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제가 사람되었다’고 감사의 말과 함께 진심어린 사과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얼마 뒤 임씨는 A씨 글의 일부 내용이 허위라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회식 날) 무슨 지병이 있어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모두 소주 3병은 기본으로 마시고 돌아가야 했다”, “어떤 날은 단체로 룸싸롱(룸살롱)에 몰려가 여직원도 여자를 초이스해 옆에 앉아야 했다”는 부분 등이 사실과 다르다며 “거짓된 내용을 게시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였다.

“벌주 마셨지만 ‘소주 3병 강요’ 아냐, ‘룸살롱’ 아닌 ‘가라오케’”

서울동부지법 박창희 판사는 일부 직원들 증언을 근거로 A씨에게 벌금 200만원형을 내렸다. 박 판사는 “(임씨가) 직원들과 회식할 당시 속칭 파도타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벌주를 마시게 하는 등 다소간의 강제성을 띠는 음주방식으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무슨 지병이 있어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모두 소주 3병은 기본으로 마시고 돌아가야 했다’고 볼 정도로 음주를 강요하는 회식을 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직원들과 가라오케 주점을 찾아가 도우미를 동석하게 한 적은 있으나 속칭 ‘룸싸롱’에 데리고 가 여직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유흥접객원을 선택해 동석하도록 한 사실은 없고, 피고인에게 ‘룸살롱에 몰려가 여직원도 여자를 초이스 해 옆에 앉아야 했다’고 얘기한 적도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일부 허위’ 표현이 기재됐다는 점을 들어서 A씨 글이 “(임씨를) 비방할 목적으로 거짓된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보일 뿐 일부 상세한 부분이 진실과 약간 차이가 나는 데 불과하다거나 다소간의 과장된 표현이 있는 경우로서 주요한 동기 내지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판결 직후 셰도우핀즈, 십대여성인권센터IT지원단WomenDoIT,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청년유니온, 테크페미, 한국여성노동자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룸싸롱의 접객부나 가라오케 도우미나 모두 여성을 성상품화하는 직군”이라며 “권력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 어떤 강압이 있었고 그것을 SNS로나마 공론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공론화가 갖는 공공의 이익성만 잘 판단했더라도 기각될 수 있었는데 2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이 선고돼버렸다”고 지적했다.

▲ 1심 판결문 발췌.
▲ 1심 판결문 발췌.

양태정 변호사는 “판결문은 ‘여자 도우미 동석은 맞지만 유흥접객원 초이스는 시키지 않았다’는 취지다. 도우미와 유흥접객원 여부에 큰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보자는 (임씨가) 직원들에게 근무시간 외의 강압적인 음주 자리를 만들었다거나 여성 직원 옆에도 도우미를 앉게 하는 인권침해적 행태를 공익적으로 고발했다”며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부 허위가 있더라도 전체적 부분이 사실이고 공익적이면 명예훼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양 변호사는 “(1심 판사는) 특별한 이유 없이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비방이 목적이고 공익성이 없다고 판단해버렸다. 이 정도면 공익성 판단 이유를 쓰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1심 형사 단독 판사가 (합의부 등에 비해) 견제받지 않는 판결을 내리면 (2심에서)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향후 재판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재판만이 아니다. 임씨는 2018년 5월 A씨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민사 소송도 제기했다. 셰도우핀즈 활동가들은 민사 소송에 제출된 증거자료들을 “2차 가해 범벅”이라 표현했다. 테오즈는 “안희정의 성폭력 재판 때처럼 그의 편에선 사람들이 2차 가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셀레브 직원들을 인터뷰한 형식의 녹취록을 민사 재판 증거로 제출했는데 내용이 저급하다. ‘(A가) 신장이 안 좋다더니 왜 스타벅스 커피는 그렇게 자주먹었는지 모르겠다’ ‘인사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 정도로 A가 스트레스였다’는 식이었다”고 전했다. 제로섬은 “50페이지 정도 분량이 대부분 A씨에 대한 모욕성 내용”이라며 “임씨 지인 중 하나는 재판을 방청하다가 임씨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게 아니다’고 말하면서 끼어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형사재판 진행 중에 거액 민사소송…“소송자료, 2차가해 범벅”

임씨는 또 1심에서 승소한 명예훼손 재판에 대해 항고장을 제출하고, 이 항고장을 민사소송 증거로 제출했다. A씨의 페이스북 글(정보통신망)뿐만 아니라 A씨 제보로 인한 한국일보·JTBC 등의 언론 보도(출판물) 역시 명예훼손이라는 취지다. 앞서 임씨는 A씨를 출판물·정보통신망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동부지검은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만을 재판에 넘겼다.

항고장에서 임씨 측은 A씨의 ‘관심병’이 사건의 본질이라면서 세월호 관련 SNS들을 사례로 들었다. “(관심병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직접 겪은 것처럼 표현하거나 허위, 과장된 표현이라도 그것이 자극적이어서 타인의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서슴지 않고 이로써 악인이 아닌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도하기도 한다”며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 당시 SNS상에 세월호 탑승자가 보낸 문자인 것처럼 ‘아직까지 생존해있다’ ‘식당 옆 객실에 6명 있다’는 허위문자를 유포한 사례를 들 수 있다”고 했다.

▲ 양태정 변호사(공익제보센터 굿로이어스). 출처=화난사람들 유튜브 갈무리
▲ 양태정 변호사(공익제보센터 굿로이어스). 출처=화난사람들 유튜브 갈무리

양 변호사는 “제보자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민사일 수 있다”며 “‘벌금 200만원 내고 전과자 될래, 아니면 대신 5000만원 낼래’ 하면 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전형적으로 내부고발자를 압박하는 방법”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들은 내부고발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관행에 대해서도 당부했다. 셰도우핀즈는 언론에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인터뷰 가이드라인’을 첨부했다. △인터뷰 대상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양태정 변호사와 셰도우핀즈의 익명 활동가여야 할 것 △인터뷰 전·후 내용 검토 협조 △성폭력·성희롱·피해자 키워드로 검색되는 전형적인 사진·일러스트 사용을 삼갈 것 등의 내용이다.

테오즈는 “A씨는 처음 사례가 알려졌을 때 ‘룸살롱’, ‘스타트업 젊은 대표가 여직원 데리고 가서 초이스시켰다’는 자극적 부분에 집중돼 아쉬웠다고 했다”며 “이미지 사용은 특히 민감하다. 피해자들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상품화하거나 전형화하는 일러스트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저널리즘 윤리 관련 이슈들이 나오면서 많이 나아졌는데 과거에 (언론이) 피해자들을 힘들게 한 사건이 많아서 경계심이 있는 편”이라 전했다.

셰도우핀즈는 내부고발 사건이 공론화되어도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남기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임 대표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한 이들은 경찰 조사에 참여하거나, 익명의 언론 인터뷰에 응했지만 법정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이들은 전했다. 셰도우핀즈는 “미국은 직장내성희롱에 엄격한 법과 EEOC(고용기회평등위원회)가 중간에서 소송을 대리하고 분쟁을 조율하며 강력한 지지기반을 만들어준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사측에 대해 공동 소송을 하면 억대 손해배상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은 피해자들이 고소만 당하고 있다”며 “가해·피해자의 위치가 거꾸로 된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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