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박재동 화백 성폭력 ‘기획미투 의혹’ 기사 무단송고에 해당 기자를 징계하고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향신문 조치를 두고 국내 언론의 ‘무조건적 피해자 중심주의’를 적용한 결과란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국제기구와 국제 언론인단체, 해외 언론사들은 취재‧보도 과정이 피해자에 대한 ‘구별 짓기’를 비롯한 2차가해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대원칙 아래 섬세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해 ‘여성과 소녀 대상 폭력에 대한 보도하기: 저널리스트를 위한 핸드북’을 발행했다.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퍼진 뒤, 기자가 성폭력 사건을 취재 보도하는 과정에서 유의할 점을 정리했다. 유네스코는 가이드북에서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2차 가해를 경계하도록 규정하는 대목을 따로 명시했다. “2차 가해를 피하고 생존자들을 회복탄력성 있는 존재(resilient)로 묘사하라” 항목이다. 가이드라인은 “생존자들이 한 번은 그들이 겪은 폭력으로, 또 한번은 차별적이거나 비하적인 보도, 가해자에게 관대하지만 피해자에게는 비난어린 보도로 이중 피해를 겪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밝혔다.

▲유네스코가 지난해 발행한 ‘여성과 소녀 대상 폭력에 대한 보도하기 저널리스트를 위한 핸드북’.
▲유네스코가 지난해 발행한 ‘여성과 소녀 대상 폭력에 대한 보도하기 저널리스트를 위한 핸드북’.

유네스코는 일반 권고 챕터에선 “표제에 유의하라”는 항목을 담기도 했다. 해당 가이드북은 “사람들은 기사를 읽지 않지만 제목을 보고 기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기사 제목은 중요하다”며 기사 제목이 “젠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가? 사안을 화제거리나 관음증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가? 피해자를 존중하는가? 가해자에게 집중하는가?”를 반문하도록 했다.

이들 권고에 비출 때 강진구 경향신문 기자의 기사 “박재동 화백 ‘치마 밑으로 손 넣은 사람에 또 주례 부탁하나’ 미투 반박” 제목은 성폭력 사실을 선정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국제기자연맹(IFJ)도 2012년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한 보도 가이드라인에서 “성차별주의 관점에 기여하지 말라. 어떤 방식으로도 (성폭력 발생이) 생존자의 탓이라고 시사하거나, 여성의 행동이나 복장, 태도에 조언을 하지 말라”고 밝혔다. 이어 “전체 이야기를 말하되, 불필요하게 자세히 보도하지는 말 것”을 밝히고 “해당 공동체와 장소, 그리고 여성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사건을 맥락 위에 위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NYT 젠더에디터 “많은 경우 서류 흔적 없어…취재 시 증명요구 딜레마”

해외 언론사들은 성폭력 사건을 접근하는 방식에 한층 깊은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2차 가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뿐 아니라, 명시적 기록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고려한 취재윤리를 고민하고 있다.

제시카 베넷 뉴욕타임즈(NYT) 젠더에디터는 미투가 터져나오던 2017년 말 공개 대담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는지 확인하는 취재 과정에서 종종 피해자를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딜레마를 거론했다. 그는 여성전문 뉴스 블로그 ‘제제벨’ 편집장 코아 벡과의 대담에서 “성폭력 고발을 취재하는 과정은 일관된 절차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이 취재에 가이드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사안마다 그 특성 맥락을 달리 하는 성폭력 사건을 하나의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제시카 베넷 뉴욕타임즈 젠더에디터. 야후 유튜브 갈무리
▲제시카 베넷 뉴욕타임즈 젠더에디터. 야후 유튜브 갈무리

베넷 에디터는 이스라엘 호로비츠 극작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9명 외에 각 2명의 증언자를 취재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많은 경우에서 서류상의 흔적은 정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여성들이 기꺼이 나를 믿었다는 점에서, 또 (피해) 당시 사람들에게 말했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행운이라 느꼈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곤란하다. 어떤 경우 이는 피해자에게 ‘30년 동안 대화하지 않은 사람들(증언해 줄 조력자)에게 전화하라’고 요구하는 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베넷 에디터와 벡 편집장은 피해자의 일기, 정신건강 관련 기록, 우울증 진단 자료, 치료사를 만난 기록 등 다양한 확인취재 방법을 언급했다. 벡 편집장은 그러면서도 “이를 통과하는 이들조차 정신건강 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벡 편집장은 이어 “얼마나 섬세하게 묻든, 피해자에게 ‘사건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느냐’ 묻는 것을 비롯해 보강 증거를 요구하는 일은 성폭행이나 성폭력의 함정에 빠지는 것과 같다”며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당하면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녀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뉴욕타임즈는 지난해 6월 공지 게시판을 통해 미국의 칼럼니스트 겸 작가 E. 진 캐롤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투 사건을 보도하면서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밝혔다. NYT 웹사이트 갈무리
▲뉴욕타임즈는 지난해 6월 공지 게시판을 통해 미국의 칼럼니스트 겸 작가 E. 진 캐롤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투 사건을 보도하면서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밝혔다. NYT 웹사이트 갈무리

NYT는 지난해 6월 미투 사건을 보도한 뒤 내부 가이드라인을 획일적으로 적용해 소극적으로 보도한 데에 독자들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NYT는 미국의 칼럼니스트 겸 작가 E. 진 캐롤이 24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폭행 시도를 당했다고 고발하는 내용을 보도했지만, 새로운 증언자를 찾도록 한 비공식 보도 가이드라인을 따라 온라인에선 기사를 삭제하고 지면기사는 ‘책’ 섹션에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딘 배켓 NYT 편집국장은 “타임즈가 이 기사를 소극적으로 보도했다는 비판자들의 말이 맞다”며 “홈페이지에서 헤드라인 기사로 더 눈에 띄게 발표해야 했다고 결론내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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