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교육 강사는 자신의 정치 및 정부 정책에 대한 견해를 교육 내용에 포함해서는 아니 된다.”

2017년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일선 강사에게 강제했던 ‘서약서’의 일부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는 정부 국정과제 홍보 영상을 틀었다.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량을 기르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외면했던 지난 정부의 장면이다.

지난 27일 범정부 차원의 첫 미디어 교육 정책인 ‘디지털 미디어 소통역량 강화 종합계획’이 공개됐다.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행정안전부 등 5개 부처가 참여했다. 청소년·성인 ‘팩트체크 교육’ 등 미디어 정보 판별 역량 강화 정책을 비롯해 Δ 온·오프라인 미디어 교육 인프라 확대 Δ 국민의 디지털 미디어 제작 역량 강화 Δ 배려·참여의 디지털 시민성 확산 등이 골자다.

그동안 미디어 교육은 부처별로 산발적으로 이뤄지면서 핵심 로드맵이 없고 사업이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번 종합계획은 ‘판’을 바꿀 수 있을까.

▲ 지난달 27일 '디지털 미디어 소통역량강화 종합계획'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정책국장이 대표로 발표하고 있다.
▲ 지난달 27일 '디지털 미디어 소통역량강화 종합계획'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정책국장이 대표로 발표하고 있다.

 

범정부 정책인가 부처별 정책 모음집인가

민간 미디어 교육 분야에서 일하는 허경 전국미디어센터협의회 이사는 입법부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행정부가 나서서 범정부 정책을 이끌어냈다며 “부처 간 소통하고 협의해서 계획을 발표한 일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미디어 교육 컨트롤 타워를 마련해 종합 계획을 세우자는 논의는 19대 국회 때부터 있었다. 방통위가 소속된 상임위가 방통위 컨트롤 타워 법안을 내놓으면 문체부가 소속된 상임위에서 문체부 컨트롤 타워 대응 법안을 내며 맞섰다. 20대 국회에서는 부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교육문화체육위원회 소속 유은혜 전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컨트롤 타워를 마련하는 법안을 내놓았으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신경민 의원이 방통위 컨트롤타워 법안을 내며 다시 맞붙었고 끝내 폐기됐다.

▲ 지난해 서울 마포구 TBS에서 열린 1회 체커톤 대회. 사진=금준경 기자.
▲ 지난해 서울 마포구 TBS에서 열린 1회 체커톤 대회. 사진=금준경 기자.

이번 종합계획은 부처간 협의의 ‘첫발을 뗐다’는 점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주목할 만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종합계획을 보면 각 부처별로 새로운 사업을 하거나, 통합 사이트를 구축하고 시설과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등 ‘협력’ 정책은 있으나 정작 서로 간의 중요 사업과 예산을 조율한 흔적은 없다.
 
김양은 언론학 박사는 “종합계획이라고 하지만 제시된 미디어 교육의 사례와 과제들이 분절적으로 나열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디어 교육의 명확한 정의와 정책 방향성이 부재하다보니, 부처들의 기존 사업과 앞으로 추진할 사업을 나열해 놓은 것 같다”고 했다. 정현선 경인교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범정부 차원의 정책이라면 기존 부처별로 중복된 건 무엇이고, 사각지대는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지 담을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현재 유사한 내용의 해커톤 방식의 시민 팩트체크 공모전을 문체부 산하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방통위 산하 시청자미디어재단이 별도로 추진하고 있다.
 

팩트체크에 꽂혔다

종합계획에서 가장 부각된 교육은 ‘팩트체크’다. 청소년·성인 대상 팩트체크 기본교육과 청소년 대상 팩트체크 심화 교육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박근혜 정부 때 방통위는 ‘비판적 수용’ 교육을 경계했고, 문재인 정부 초기 방통위 중심의 범정부 ‘허위조작정보 규제’를 추진했던 데 비하면 팩트체크 중심 정책은 긍정적 변화다.

다만 ‘팩트체크’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데는 우려도 있다. 허경 이사는 “정부의 현안 과제를 엮어서 해결책으로 활용하는 방식에는 우려가 있다”며 “앞서 정부는 허위조작정보 종합대책에 미디어 교육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번 종합계획 추진 배경도 미디어 교육과 관련한 국민의 권리에 대한 고민이 출발점이 아니라 코로나19 현상에 따른 대응이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우려했다.

▲ 범부처 종합계획 자료.
▲ 범부처 종합계획 자료.

김양은 박사는 “중장기적 로드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팩트체크만 크게 부각된 점이 있다”며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역량에는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현실, 인권, 소통 등 다양한 요소가 함께 교육 돼야 한다. 초중고 교육에서 미디어 교육은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시민 역량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의체가 숙제 풀 수 있을까?

종합대책에는 새로운 기구가 두 곳 등장한다. 우선, 미디어 교육과 관련한 전반적인 체계 논의는 향후 구성할 범부처 협의체를 통해 마련한다. 협의체는 방통위·문체부·교육부 등 관계부처와 학계·지역·시민단체, 미디어교육 공공기관 등 전문가가 참여하는 방식이다. 방통위 지역미디어정책과 관계자는 “협의체 구성과 운영을 통해 효율적 시행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협의체’가 제 역할을 할지 의문스러운 시선이 있다. 우선, 이번 종합계획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부처 간 주도권을 두고 오랜 기간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부처 간 이견은 협의체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실질적인 중재, 결정 권한은 보이지 않는다. 허경 이사는 정부 주도의 논의를 경계하며 “협의체에 실질적인 민간의 참여가 보장되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성돼야 한다”며 “범정부 민관협의 구조의 판단과 결정은 지역과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정부 주도가 아닌) 상향식 논의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 2015년 인천성남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4일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미디어체험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2015년 인천성남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4일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미디어체험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협의체는 후속 논의를 위한 임시기구 성격이 강하고 제대로 된 컨트롤 타워는 법을 통과시켜야만 설립할 수 있는 정식 기구인 디지털미디어교육위(가칭)를 통해 마련할 계획이다. 방통위 지역미디어정책과 관계자는 “중장기적으로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관련 입법이 필수적”이라며 “관련 입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입법 가능성이 높지 않다. 최근 정필모 의원이 방통위가 미디어 리터러시 컨트롤 타워를 맡는 법안을 내놓은 상황에서 문체부가 대응 입법을 다시 꺼낼 수 있다. 정부여당 내 합의안이 나온다 해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경계하는 야당의 동의를 받아내기 힘들다. 국회에서 해결되지 않아 행정부 차원으로 이어진 논의인데, 다시 국회로 돌아가면 논의 자체가 ‘제자리 걸음’이 될 가능성이 있다.
 

교육부 미디어 교육 담당자 1명 뿐

이번 종합계획에 전국민 미디어 교육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교육부가 전면에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시청자미디어재단과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동아리 활동, 자유학기제 등 틈새를 공략하는 식이다. 앞으로 고교학점제, 자유학년제를 통해 진입 경로를 확대할 수 있지만 정규 교과와 연계는 부족한 상황이다.

현재 교육부 내 미디어 교육의 입지는 좁다. 미디어 교육 담당자는 민주시민교육과 소속의 연구사 1명이 전부다. 미디어 교육에 의지를 보이는 유은혜 장관이 사임한 다음 교육부는 미디어 교육 자체를 외면할 가능성도 있다.

정현선 교수는 “범부처 거버넌스를 만든다는데 왜 교육부는 거버넌스를 만들지 않는가”라며 “교육부는 차기 교육과정에 미디어 리터러시를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계획에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고 했다.

정현선 교수는 “미디어 리터러시 담당자를 민주시민교육과가 아니라 교육과정정책과로 옮길 필요가 있다. 민주시민교육과에 담당자를 둔다는 건 하나의 의제로만 본다는 의미”라며 “교육부의 역할은 학교 교육과정을 만들어 운영하는 일이다. 교육과정정책과에서 교육과정 내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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