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선생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언론에 주로 보도된 내용은 ‘위안부 단체 기부금 운영이 투명하지 않고,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으로부터 10억 엔을 받는 것을 윤미향 대표만 알고 피해자들은 몰랐다’ 등이었습니다.

그러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중심으로 윤미향 당시 더불어시민당 당선자(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피해자 할머니들의 뜻을 외면한 활동을 해왔고,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역시 부정한 데 쓴 것처럼 몰아가는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사죄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이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의 본질은 지워지고 느닷없이 ‘윤미향과 위안부 단체의 부정 의혹’ 프레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 이용수 기자회견, 어떻게 ‘정의연 회계부정 의혹’이 되었나

이용수 선생의 1차 기자회견문 전문을 보거나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면 언론보도가 ‘위안부 운동 몰아가기’라고 느꼈을 겁니다. 이용수 선생이 기자회견 또는 입장문을 통해 밝혔듯 주장의 핵심은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의혹’이 아닙니다.

‘① 한일 국민 간 건전한 관계 구축을 위해 학생 간 교류와 공동행동 등 넓히는 교육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② 투쟁과정에서 오류가 있다면 극복하고 시민사회단체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③ 2015년 졸속합의 관련 시민사회 의견수렴 과정 및 정부 관계자 대화내용 등을 공개해야 한다’ 등이 요지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의 방향성과 시민사회단체의 운동방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주된 내용이지, 결코 30년 역사의 ‘위안부’ 운동이 잘못됐다는 의혹 제기가 아닙니다.

‘기부금 부실 관리’ 보도가 쏟아진 이유

이용수 선생 1차 기자회견 관련 보도 중 보도량이 가장 많은 주제는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부실 관리’였습니다. 한겨레를 제외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은 모두 관련 보도를 냈습니다. 한겨레도 정의기억연대의 해명을 중심으로 기부금 부실 의혹을 다뤘습니다.

의혹 제기 보도의 중심은 단연 조선일보였습니다. 조선일보의 <딸 미국 유학보낸 윤미향 부부, 소득세는 5년간 640만원>(5월11일 김은중 기자)이나 <김복동 장학금, 민노총·전농·진보연대 간부 자녀에 줬다>(5월11일 박상현·허유진 기자)가 대표적입니다. 앞 기사는 ‘윤미향 의원이 위안부 피해자를 이용해 딸을 유학보냈다’는 것이고, 뒤 기사는 ‘정의기억연대가 김복동장학금을 이용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를 지원했다’는 내용입니다.

▲ 5월11일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의혹을 부풀린 조선일보 기사.
▲ 5월11일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의혹을 부풀린 조선일보 기사.

그러나 두 기사를 들여다보면 이용수 선생의 1차 기자회견 내용과 무관합니다. 이용수 선생이 기부금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데모(수요집회)해서 돈 걷어서 뭘 합니까. 하나도 쓴 거 없습니다”, “제가 호텔에서 생일을 했는데, 그때 모인 축하금을 정신대와 함께 하는 할머니 시민 모임의 역사관 관장, 사무국장, 대표라는 사람이 동티모르에 천만 원 갖다 준답니다. 할머니한테 써야지요”, “120일 결의안 통과시키려고 워싱턴에 다녔는데 아무도, 돈 한 푼 보태준 사람 없습니다” 등이 전부였습니다.

공익재단이나 시민단체의 기금 운용이 기업과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회계 오류는 관계기관과 바로잡아야 하며, 이용수 선생의 기자회견과 무관하게 언제나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일부 언론이 이용수 선생의 문제제기나 정의기억연대의 해명을 뛰어넘어 상당한 부정행위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여 몰아갔다는 점입니다. 정의기억연대가 고의성은 없지만 일부 회계오류가 있다며 재공시를 요청했고, 수많은 해명자료를 냈음에도 비슷한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윤미향 의원의 시민단체 활동가 당시 월급과 자녀 유학비, 고 김복동 할머니 장학금까지 의혹을 제기한 보도가 연일 쏟아졌습니다. 급기야는 시민단체 회계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맥줏집 3300만 원 지출’ 오보가 등장하였는데, 한국경제 <정의기억연대의 ‘수상한 술값’>(5월12일 양길성·김남영·김보라 기자) 기사는 이후 수많은 시민사회단체 회계부정 의혹 관련 보도를 낳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 5월12일 ‘맥줏집에서 하루에 3300만 원을 썼다’는 오보로 회계부정 의혹을 부풀린 한국경제 기사.
▲ 5월12일 ‘맥줏집에서 하루에 3300만 원을 썼다’는 오보로 회계부정 의혹을 부풀린 한국경제 기사.

이렇게 따져보니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언론은 왜 이렇게 보도할까’입니다. 이용수 선생의 1차 기자회견과 너무도 다른 내용에 언론의 초점이 맞춰졌고, 30년 역사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폄훼와 한국 시민사회단체 운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마저 훼손시켰습니다. 민언련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1991년 8월, 고 김학순 선생이 국내 거주자 중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당시 언론보도는 어땠을까요.

2. 1991년 8월, 누구도 정치쟁점화하지 않았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선생이 국내 거주자 중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존재 사실을 부인하는 중에 국내 거주자 중 피해 사실을 밝힌 이가 없었기 때문에 무척 값지고 소중한 증언이었습니다. 국내 거주자 중 최초로 나온 공개 증언에 언론의 이목이 쏠렸습니다.

김학순 선생 증언, 조선일보 “일본 정부 공식 사죄 배상”

1991년 8월 한 달간 5개 신문을 모니터한 결과, 모니터 대상 신문 모두 김학순 선생의 공개 증언을 다뤘습니다. 조선일보 <“정신대 존재 내가 증명합니다”>, 중앙일보 <“나는 정신대” 처음 밝힌 김학순 할머니>, 동아일보 <“정신대 치욕 꼭 배상 받겠다” 국내 거주 첫 고발 김학순 할머니>, 경향신문 <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 눈물의 폭로 전선의 노리개 “짓밟힌 17세”>, 한겨레 <종군 위안부 참상 알리겠다> 등 5개 일간지 모두 김학순 선생의 기자회견을 기사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증언 당시 5개 종합일간지 보도(1991년 8월15~16일). 표=민주언론시민연합
▲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증언 당시 5개 종합일간지 보도(1991년 8월15~16일). 표=민주언론시민연합

지면을 따져볼 때 각 일간지들이 당시 기자회견을 중요하게 보도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조선일보 22면, 중앙일보 18면, 동아일보 18면, 경향신문 13면, 한겨레 15면 등 지면 끝자락에 배치했습니다. 1991년 8월16일 조선일보 1면은 <일, ‘군사대국’ 가속화>, <콜레라확산 일단 주춤>이었습니다. 하루 앞선 8월15일 중앙일보 1면은 <남북 합작공장·자원개발안 있다-노 대통령, 광복절 46돌 기념사>, 동아일보 1면은 <“북한에 합작공장 모색”>과 <콜레라 방역 허점 수두룩>, 경향신문 1면은 <서천 ‘콜레라 오염지역’ 선포>와 <남북경협 상설기구 추진>, 한겨레 1면은 <‘전후배상’ 추가제기 검토>와 <2만여명 ‘범민족’ 집회> 등이었습니다.

조선일보는 8월16일 <국내 최초의 정신대 증인>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 “일제에 의해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가 온갖 치욕을 겪어온 66세의 김학순(金學順)씨가 14일 자신의 한맺힌 삶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나라 잃은 백성이었던 우리의 과거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면서 “우리가 김학순(金學順)씨의 고백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슬픈 과거를 되씹어 보는 계기로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 묻혀진 일제(日帝)의 죄악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그것을 기초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미래와 한일양국의 진정한 선린(善隣)관계도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다”라고 썼습니다.

이어 조선일보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2백만에 이른다는 것은 상식이며, 일본의 공식 숫자도 66만을 넘는다고 하는 현실에서 일본정부의 사실규명 노력이 부족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특히 정신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일본인의 양식을 의심케 하는 바가 있다”, “김(金)씨의 증언을 계기로 우리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 문제에 대한 공식인정과 사죄, 배상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우리 정부도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건립 등 정부 차원의 대책에 적극 나서야 하리라고 본다”며 한일 정부 양측의 대책 마련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도 칼럼을 통해 일본의 진상 은폐 사실을 지적하며 사죄와 진상규명에 나서라고 주장했습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서는 사설 또는 칼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 1991년 8월16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미래와 한일 양국의 진정한 선린관계도 가능하게 된다”는 조선일보 사설
▲ 1991년 8월16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의 미래와 한일 양국의 진정한 선린관계도 가능하게 된다”는 조선일보 사설

3. 박근혜 정부 이후 ‘정치에 뛰어든’ 언론

1991년 8월 고 김학순 선생의 증언 당시엔 그 어떤 언론도 정치쟁점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피해자의 말을 전했습니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이용수 선생의 기자회견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고 김학순 선생의 증언으로 문제가 공론화된 노태우 정부를 지나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한국 정부의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93년 3월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방침으로 이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 예산에서 하라”면서 “그렇게 했을 때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새 한일 관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는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고노 담화 발표로 연결됩니다.

고노 담화에서 반성의 뜻을 밝힌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위안부’ 문제해결은 불발됩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4월21일,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피해자 지원이 시작되자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금을 늘렸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8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및 사할린 동포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부 차원의 교섭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11년 8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옵니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한일 간 외교갈등이 심화되고, 일본에서는 민주당이 정권을 내주게 되면서 자민당의 아베 신조 내각이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 정부를 지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이 지지부진해졌지만 그 사이 언론의 시각은 1991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사례만 들어볼까요. 2011년 8월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위안부·원폭 피해자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게 정부 의무”>(2011년 8월30일), 한겨레는 <사설-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라는 헌재 결정>(2011년 8월 30일)이란 제목의 사설을 냈습니다.

조선일보는 위 사설에서 “정부는 헌재 결정에 따라 위안부·원폭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아낼 수 있도록 외교적·국제법적 노력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번 결정은 다른 나라의 불법 행위로 자국민이 인권을 침해당했을 경우 정부엔 피해 구제를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헌법상 의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썼고 한겨레는 위 사설에서 “공식적으로 일본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외교협상을 벌여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확인시키고, 공식 사죄와 배상 등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강도는 다르지만 둘 다 외교를 통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이러한 언론 논조는, 박근혜 정부를 지나오면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고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되면서 크게 바뀌었습니다.

① 2015년 대통령 기념사 “‘위안부’ 피해 할머니 인권문제 해결해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얼어붙었던 한일 외교관계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계속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초, 아베 총리가 2012년 말 취임한 뒤 2년 8개월간 양국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2015년 11월, 두 정상이 만나게 되는데 이명박 정부까지 합해 3년 반 만에 열린 정상회담이었습니다. 그동안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은 데는 박근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 개최 여부와 엮으면서 스스로 외교관계를 경색시켰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취임 후 계속해서 강경하게 ‘위안부’ 해결 목소리를 내던 박근혜 정부는 2015년 기념사에서도 강경한 주문을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해 제96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성숙한 미래 50년의 동반자가 돼 새 역사를 함께 쓸 때”라며 “우리는 양국이 미래로 함께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역사적 과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라고 촉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또 “올 들어 벌써 두 분이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날 박 대통령 3‧1절 기념사는 5개 일간지 모두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북엔 “대화하면 길 열려” 일엔 “반성해야 길 열려”>(2015년 3월2일)에서 박 대통령의 3‧1절 메시지를 두루 해석하며 ‘위안부’ 문제해결을 촉구했다고 썼습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박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문제 해결을 강조했다는 내용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경향신문은 ‘위안부’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고, 한겨레는 <박 대통령, 대일 강경론 유지… 3·1절 경축사 ‘과거사 해결’ 촉구>(2015년 3월2일)에서 “박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기존 입장을 고수해 한-일 관계가 조만간 정상화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써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 2015년 3월2일, 박근혜 대통령 3‧1절 기념식 5개 종합일간지 보도. 표=민주언론시민연합
▲ 2015년 3월2일, 박근혜 대통령 3‧1절 기념식 5개 종합일간지 보도. 표=민주언론시민연합

5개 신문이 비슷한 논조는 사설, 칼럼에서 드러납니다. 그동안 경색된 한일 관계를 걱정하는 내용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모두에 포함됐습니다. 조선일보는 칼럼에서, 나머지는 사설에서 외교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글로벌 포커스-일본 역사수정주의와 수정주의적 대일 전략의 충돌>에서 ‘일본은 원론적인 역사수정주의를 재고해야 하고, 한국도 대일 전략을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면서도 일본에 요구하는 우리 정부와 피해자의 요구를 적시했습니다. 이날 사설에서 박근혜 대통령 기념사와 관련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중앙일보는 <사설-“역사는 취사선택해 기억하는 게 아니다”>에서 “일본 측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박 대통령이 먼저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긴 어려웠을 것이다”며 박근혜 정부를 옹호하면서도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용기 있고 진솔한 행동을 촉구했습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외교적으로 봤을 때 ‘메아리가 없다’거나 ‘갑갑하기 그지없다’라고 평가했습니다.

▲ 2015년 3월2일, 박근혜 대통령 3‧1절 기념식 당시 5개 종합일간지 사설과 칼럼. 표=민주언론시민연합
▲ 2015년 3월2일, 박근혜 대통령 3‧1절 기념식 당시 5개 종합일간지 사설과 칼럼. 표=민주언론시민연합

②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협상부터 달라진 태도

2015년 3월까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 인식을 보여준 언론은 2015년 12월부터 극명하게 나뉘게 됩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이 전쟁범죄이자 반인권 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합의했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다시는 위안부 관련 문제를 국제 사회에서 꺼내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렸습니다. 이 조건에 따라 일본 아베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에서 사죄와 반성의 목소리를 냈고, 10억 엔의 정부출연기금도 내놓기로 했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번 협상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수용불가’를 선언했습니다.

언론은 한일 양국이 합의한 내용과 구체적 의미를 제대로 알려줘야 했습니다. 협의에 대한 상반된 주장도 담고, 불신하는 여론에 대해 정부의 답변을 촉구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일 간 합의에 숨겨진 문제 사안은 덮어둔 채 일부 언론은 박근혜 정부의 외교적 성과로 보거나 피해자의 목소리는 잊고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잊자’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썼을 당일 조간신문에서는 △양측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창의적 해법’에 대한 기대와 △언론플레이에 나선 일본을 경계하고 ‘어정쩡한 타협’을 우려하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조선일보 <한·일, 위안부 법적 책임 중립적 표현으로 돌파구 찾나>(2015년 12월28일 이용수 기자), 중앙일보 <기싸움 밀릴 수 없다, 하얗게 센 머리 염색 안 한 이상덕>(2015년 12월28일 안효성 기자), 동아일보 <‘설익은 합의땐 역풍’ 박대통령 고민>(2015년 12월28일 우경임 기자), 경향신문 <위안부 문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해결 급물살>(2015월 12월28일 유신모 기자), 한겨레 <서두르는 한·일… “위안부 창의적 해법 모색”>(2015년 12월28일 이제훈 기자) 등에는 협상을 통한 “창의적 대안”, “문제해결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담겼습니다.

▲ 2015년 12월28일, 한일 합의 전 한국 정부의 제대로 된 대응을 요구한 조선일보.
▲ 2015년 12월28일, 한일 합의 전 한국 정부의 제대로 된 대응을 요구한 조선일보.

협상 내용에 대한 우려도 나왔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사설-정부, 위안부 협상 시끄럽게 나오는 일 의도 알고는 있나>(2015년 12월28일)에서 “아베 총리가 정말 ‘책임지겠다’는 각오라면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국가 책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만약 한·일 공동 기금이라는 형식으로 은근슬쩍 일본 정부의 책임을 피해가려 한다거나,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사과로 때우려 한다면 우리 국민은 물론 위안부 피해를 당한 다른 나라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라며 자못 강하고 선명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중앙일보, 합의 다음 날 “한일 미래로 나아가야”

그러나 다음 날인 2015년 12월 29일, 5개 일간지는 공통적으로 한일 협상 결과에 대하여 우려와 환영을 담았습니다. 우려한 것은 △이번 협상이 법적 구속력이 없음 △‘최종 해결’이 되어버림 △피해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를 포함한 국민 전반의 정서와 위배됨 등이었고, 환영한 것은 △일본 정부가 최초로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공식 인정함 △일본 정부 예산으로 피해 할머니 지원 사업을 하겠다고 약속함 △24년 만에 최대 외교 현안을 해결하고 양국 관계의 새로운 기틀을 닦았음 등입니다.

▲ 2015년 12월29일, ‘위안부’ 협상 당시 5개 종합일간지 사설. 표=민주언론시민연합
▲ 2015년 12월29일, ‘위안부’ 협상 당시 5개 종합일간지 사설. 표=민주언론시민연합

신문마다 ‘방점’은 달랐습니다. 합의를 가장 강경하게 비판한 신문은 한겨레였습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위안부 제도라는 ‘국가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며 결국 법적 책임 없이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일본이 내놓은 미완의 해법에 우리 정부가 들러리를 서는 듯한 모양새”라며 “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을 ‘외교적 해법’이라며 국민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더불어 “두 나라는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결을 언급할 게 아니라 진정한 해법을 위해 새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추가 논의를 촉구하였습니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짚은 뒤 ‘협상이란 원래 모두가 만족하기 불가능한 것’이고, 앞으로 ‘일본의 행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했습니다. 두 신문은 일반 기사에서 정부의 졸속 협상을 비판하는 피해자들의 분노를 담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먼저 “일본 측이 이번 협상 과정에서 강하게 요구했던 것들을 모두 들어준 셈”이라며 우려를 표했다가 바로 이어 “위안부 문제에만 매달려 한국과 일본이 반목하는 국면이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된다”며 ‘결론’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에는 “합의내용에 대해 최대한 세심한 설명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중앙일보는 ‘과거에 천착하지 말자’는 조선일보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앞을 보고 갈 것’을 주문했습니다. <사설-한·일 양국은 이제 앞을 보고 가자>(2015년 12월29일)는 협상의 문제점을 짚기보다 이후 “위안부 할머니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불복해 국내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법적 소송”을 전개하거나 “국제사회에서의 상호 비난·비판”이 이뤄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데 더 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교에서는 본질적으로 완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격언’이나 “이번 타결 내용은 실질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냈다”는 외교부의 주장을 적극 인용했습니다. 사설의 마지막 문장도 “이번 합의를 계기로 한·일 양국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찬 제의’로 마무리했습니다.

협상 전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내용입니다. 특히 중앙일보는 전날 사설에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사설-역사적 위안부 담판, 일본의 진정성에 달렸다>(2015년 12월28일)에서 “보편적 여성의 인권 문제인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라면서 “아베 총리 개인 명의로 어정쩡한 사과를 하고, 위로금 성격의 돈 몇 푼 지급하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는 식이라면 일본이 바라는 ‘완전한 해결’은 영영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입장이 확 바뀐 것입니다.

▲ 2015년 12월29일, 한일 ‘위안부’ 협상 이후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는 중앙일보 사설.
▲ 2015년 12월29일, 한일 ‘위안부’ 협상 이후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는 중앙일보 사설.

조선일보 “합의안에 의견 엇갈린 위안부 할머니들”

한편 조선일보는 <“합의 인정 못한다” “만족 못해도 따라야죠”… 엇갈린 할머니들>(2015년 12월29일 선정민·엄보운 기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28일 한·일의 위안부 합의안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발과 ‘만족은 못 하지만 정부 뜻은 따르겠다’는 반응으로 엇갈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중앙일보도 <“만족 못해도 따를 것” “전부 무시하겠다”>(2015년 12월19일 임명수·윤정민·오종택 기자)처럼 비슷한 논조로 쓴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유희남 할머니는 기자회견에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정부에서 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잠시 후 ‘법적 배상이 아닌 기금 조성’이라는 말에 “우리가 그들로부터 의료지원, 신세 질 필요 없다. 어떤 할머니도 기금 조성에 대해서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장을 번복했다”라고 써 피해자 할머니들 발언의 정확한 맥락을 짚었습니다.

이같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는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같은 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2015년 12월29일)에 출연한 이용수 선생은 “그같은 의견을 밝힌 피해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는 상태고 현재 정확한 사리판단이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이번 합의를 ‘인정’하고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협상 이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 관건이라던 중앙일보 사설.
▲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협상 이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이 관건이라던 중앙일보 사설.

③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상반된 태도, 조‧중‧동VS한‧경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로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됩니다. 2016년 7월28일 화해치유재단 출범 기자간담회와 화해치유재단 사무실 현판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공식 출범을 알리는 행사였는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기자간담회장에 대학생 20여명이 나타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외면한 재단 설립에 반대한다”며 기습 점거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태현 이사장이 행사를 마치고 건물을 나서던 중 캡사이신을 맞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현판 제막식은 별다른 일없이 진행됐습니다.

다음 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김태현 이사장이 캡사이신을 맞았다는 사실‘만’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출범 첫날 고춧가루액 맞은 ‘위안부 재단’>(2016년 7월29일 이용수 기자), 중앙일보 <“한·일 합의 반대” 외치며 호신용 스프레이 뿌려>(2016년 7월29일 유지혜·정진우 기자)가 그것입니다. 특히 중앙일보는 1면에 ‘캡사이신 테러’라는 제목을 달아 컬러 사진을 배치했습니다. 화해치유재단 관련 기사는 1면 사진과 10면 기사가 유일했습니다.

동아일보는 <한 “전액 피해자 지원” 일은 “결정된 바 없다”>(2016년 7월29일 이지은·장원재·조숭호 기자), <일 출연금 70% 위안부할머니 직접 지원… 30%는 추모사업에>(2016년 7월29일 조숭호·김단비·장원재 기자>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사업이 본격화됐다”며 화해치유재단 현판식을 보도했고, 10억 엔을 어떻게 쓸 것인지 협의 중인 사실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재단 출범을 계기로 생존 피해자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을 통해 화합과 마무리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고 썼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캡사이신 세례’, ‘대학생 10여명 현장 난입해 난동’ 등의 표현으로 보도했습니다. 동아일보는 <횡설수설-위안부 재단 출범일의 ‘테러’>(2016년 7월29일 권순활 논설위원)에서 캡사이신 ‘테러’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 2016년 7월29일, 화해치유재단 출범 다음날 중앙일보 1면 사진. 중앙일보는 화해치유재단과 관련해 해당 기사만 보도했다.
▲ 2016년 7월29일, 화해치유재단 출범 다음날 중앙일보 1면 사진. 중앙일보는 화해치유재단과 관련해 해당 기사만 보도했다.

이때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선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도, 막무가내로 출범하는 재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화해치유재단 출범 기자간담회 사건만을 ‘난동’, ‘테러’로 규정하며 마치 한일관계 개선에 불만을 가진 극단적인 목소리만 있는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한겨레는 기자간담회 두 사건을 따로 보도했고, 경향신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화해치유재단이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보다 후퇴했다”거나 “화해도 치유도 없는 위안부 재단이 졸속 출범했다”는 논조는 같았습니다. 

한겨레는 <위안부 재단,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보다 되레 후퇴>(2016년 7월29일 김진철·이제훈·길윤형 기자)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 주도로 설립된 반면 화해치유재단은 한국 정부가 나서서 출범 △아시아여성기금은 자료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화해치유재단은 의료비‧위로금 일시적 지원에 그쳐 등을 이유로 1995년 발족했다 실패한 ‘아시아여성기금’보다 후퇴했다고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경향신문은 <재원 조달‧사업계획 다 ‘깜깜이’… 위안부 재단 ‘막무가내 첫발’>(2016년 7월29일 남지원 기자)에서 일본 정부가 출연하기로 한 자금 10억 엔의 이전 시기가 미정인 데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과 계획도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한겨레는 <“재단이고 돈이고 다 필요없어요 제대로 된 일본 사죄 받고 싶어요”>(2016년 7월29일 박수진 기자)에서 김복동 선생을 비롯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았고, 경향신문은 <정대협 “피해자들 외침에 귀 막은 정부… 누구를 위한 재단인가”>(2016년 7월29일 노도현 기자)에서 정대협 등 시민단체의 비판을 보도했습니다.

▲ 2016년 7월29일,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대한 5개 종합일간지 보도 내용. 표=민주언론시민연합
▲ 2016년 7월29일,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대한 5개 종합일간지 보도 내용. 표=민주언론시민연합

4. 문제해결 위해 ‘피해자 목소리’로 돌아가자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런 일이 없다니 말이 됩니까.”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선생이 일본군 ‘위안부’를 최초 증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엔 모든 언론사가 그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김씨의 증언을 계기로 우리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문제에 대한 공식인정과 사죄, 배상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우리 정부도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건립 등 정부 차원의 대책에 적극 나서야 하리라고 본다”(조선일보), “보상은 고사하고, 사죄조차 한마디 제대로 한 일이 없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실로 간사하고, 뻔뻔한 사람들이다. (중략) 지금도 늦지 않다. 정신대 할머니들은 이제 인생의 한고비를 넘기고, 영욕을 초월할 연세가 되었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도 증언을 남겨야 한다”(중앙일보)고 역설한 언론사는 30년도 되지 않아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입장을 바꾼 걸까요?

30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정치적으로 ‘민주’ 정부도 들어서보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시민사회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일본에서도 정권이 바뀌었고, 국제정세도 시시각각 달라져왔습니다. 그렇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방향과 방법도 달라졌을까요?

언론보도에서 눈에 띄게 변화한 지점은 ‘피해자 관점’의 유무입니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뜻합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경우 피해자가 기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닌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외교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 ‘역사 청산을 위해서’ 등의 이유를 대며 일본과 타협하자고 주장합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일부 사설과 칼럼에선 ‘정치적인 선택을 위해’ 옳은 말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언론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없어졌습니다.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 피해자의 목소리 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건 애초 ‘해결’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제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본의 공식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죄와 법적 배상, 자라나는 미래세대의 올바른 역사 인식 제고를 위한 교육 등을 끝까지 요구해야 합니다. 평화운동가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고 김복동 할머니는 이렇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달라. 재일조선학교 아이들 지원하는 문제를 나를 대신해 끝까지 해달라.”

 

※모니터 기간: 1991년 8월, 2015년 3월1~4일, 2015년 6월22~24일, 2015년 12월28~30일, 2016년 1월13~15일, 2016년 7월28~30일
※ 모니터 대상: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지면보도에 한함)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