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설계사 A씨는 지인을 통해 보험계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B씨 집을 방문했다. 보험계약 체결 후 B씨는 상의를 벗어 몸에 난 상처를 보이며 문신을 지운 상처이고 과거 조폭이었다고 위협하며 성관계를 요구했다. A씨는 생리중이라며 거부했지만 B씨가 주먹을 쥐고 때릴 듯 협박한 뒤 A씨를 침대에 밀쳐 넘어뜨리고 몸으로 눌러 강간했다. A씨는 다음날 B씨를 고소했지만 인천지방법원은 2012년 6월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B씨는 ‘A씨가 흔쾌히 동의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A씨가 생리 중이었고 둘이 초면이었으며 낯선장소(B씨 집)에서 흔쾌히 성관계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 주장대로 ‘심각한 유형력 행사’가 있었다면 몸에 상당한 손상이 있어야 하는데 근거가 부족하다며 A씨 진술도 의심했다. 이에 A씨가 별로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B씨가 강간죄로 처벌당할 만큼 A씨에게 폭행 등을 가했다고 보기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 

A씨가 더 강하게 거부하거나 B씨가 A씨에게 더 상처를 입혔어야 형법상 강간죄로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약간의 위력만 행사할 경우 피해자도 성관계에 동의했다고 보는 게 사법부 시각이다. 1995년말 개정해 25년간 유지된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 부분의 입법과 이를 해석하는 사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강간죄개정연대회의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 상담사례 분석결과 직접적 폭행·협박없이 발생하는 강간이 전체 71.4%에 달했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지금처럼 법 조문상 ‘폭행·협박’, 사법부 해석상 ‘반항이 현저히 곤란한 정도’로 하지 않고 상대방의 동의가 없으면 처벌하는 쪽으로 형법을 개정하는 ‘비동의강간죄’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다. 미투운동이 활발했던 지난 국회 때 법안 10개를 발의했지만 폐기됐고, 이번 국회에선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법을 대표발의했다. 이어 지난 12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미디어오늘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류 의원을 만났다. 

▲ 비동의강간죄(형법 일부개정안)를 대표발의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 사진=류호정 의원실
▲ 비동의강간죄(형법 일부개정안)를 대표발의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 사진=류호정 의원실

 

백 의원 법안이 강간죄 구성요건을 ‘가해자의 유형력 행사’에서 ‘피해자의 의사’로 개정하고 ‘저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폭행·협박’으로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2분의1까지 가중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면 류 의원 대표발의 법안은 형법 제32장(형법 297~305조)를 전반적으로 손을 봐 개정범위가 더 넓다.

정의당 ‘비동의강간죄’ 형법 32장 전면개편

류 의원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형법 297조 강간죄를 상대방 동의 없이(1항), 폭행·협박 또는 위계·위력(2항), 심신상실·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3항)으로 세분화했다”며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폭행과 협박’으로 간음한 경우에만 강간죄를 인정해선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강간추행죄를 규정한 형법 298조도 ‘상대방 동의없이 추행한 사람’(1항)을 신설했고 기존 조항에는 폭행·협박뿐 아니라 위계·위력도 넣고 처벌을 강화했다. 

또 개정안에서는 형법 제32장 제목을 ‘강간과 추행의 죄’을 ‘성적 침해의 죄’로 바꾸고, ‘간음’이라는 표현도 ‘성교’로 바꿨다. 류 의원은 “간음의 사전적 의미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성관계를 맺음’으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며 “특히 ‘간(간사할 간, 姦)’자는 계집녀(女)를 세 번 쓴 것으로 여성혐오 표현이라 ‘성교’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기존 법안이 ‘비동의간음죄’였다면 정의당안에서 ‘비동의강간죄’로 부른 이유다. 

▲ 현행 형법상 성범죄 구성요건에 따른 처벌 공백. 자료=한국형사정책연구원
▲ 현행 형법상 성범죄 구성요건에 따른 처벌 공백. 자료=한국형사정책연구원

 

비동의강간죄 비판 주장들

비동의강간죄에 대한 가장 많은 비판은 사전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는 경우에 대한 우려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저서 ‘형사법의 성편향’에서 ‘동의 여부 판단의 어려움’과 ‘피해자 의사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우려했다. ‘사전계약서를 쓰고 성관계를 해야하느냐’는 언론보도도 많았다.

류 의원은 “‘양해’, ‘승낙’ 등 이미 법에 추상적인 법률용어가 있는데 ‘동의’ 개념만 입법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고 판례·법해석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며 “구체화하며 사회적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게 이 법안의 의의”라고 주장했다. 이어 “판례들 추세가 위계(속임수)·위력(권력)관계에서 동의여부를 살펴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류 의원은 “동의 의사가 외부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내심의사만으로 범죄가 정해진다는 말이 아니다”라며 “지금도 이미 피해자 증언 뿐 아니라 수사에서 보강증거를 포함해 종합적으로 판단하므로 피해자 일방 주장만으로 형사처벌이 이뤄질 수 있다는 건 억측”이라고 말했다. 

여성계에선 최근 술·약물을 이용해 상대 동의를 받지 않은 강간이 늘고 있어 입법공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루밍 성범죄의 경우는 합리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류 의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삭제하고 종교인과 신자, 상담자와 내담자, 의사와 환자, 문화체육계 종사자처럼 업무상 관계가 아니지만 위계·위력이 존재하는 영역을 법 테두리 안에 넣었다”고 말했다. 

비동의강간죄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전국민고용보험제, 그린뉴딜추진특별법, 차별금지법과 함께 정의당이 밝힌 5대 입법과제 중 하나로 정의당 의원 6명과 최초 여성 국회부의장인 김상희 의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정춘숙 의원 등 총 13명이 법안발의에 함께했다. 류 의원은 국회 곳곳에 법안통과에 동참해달라는 대자보 100장을 붙이기도 했다. 그는 “정의당에 법사위(법제사법위원회) 의원이 없어 (법사위 의원에게) 설득하고 앞으로 토론회도 열 예정”이라고 했다.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 곳곳에 비동의강간죄를 소개하는 100장의 대자보를 붙였다. 사진=류호정 의원실
▲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 곳곳에 비동의강간죄를 소개하는 100장의 대자보를 붙였다. 사진=류호정 의원실

 

국제사회 추세, 사회인식 변화해야

류 의원은 “미투운동,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을 보면 성범죄에 대한 개념과 사회분위기가 변하는데 법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한쪽이라도 동의하지 않은 성교는 강간이다. 개정안 통과과정에서 사회적 인식도 변화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강간죄에서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권고했고 국제형사재판소, 유럽인권재판소는 동의여부에 따라 강간을 판단하고 있어 (비동의강간죄는) 국제사회 추세”라고 덧붙였다. 

이유정 변호사는 ‘비동의간음죄의 신설에 대한 논의’란 글에서 이런 예시를 들었다. 누군가 남의 집에 들어갔다 체포됐는데 자신이 집주인 의사에 반해 침입한 게 아니라 잘못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가정했다. 형사범죄의 경우 원칙상 검사가 피고인에게 ‘피해자(집주인) 의사에 반했는지’를 입증해야 하지만 사실 침해사실 자체만으로 일단 피해자 의사에 반한다고 추정한다.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된다. 이처럼 입증책임이 피고인에게 전환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주장이다. 

정의당에서 추진하는 젠더 관련 법안이 더 있는지에 대해 류 의원은 “일단 법 통과가 중요하다”며 “성폭력 인식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라고 말했다. 이어 “배복주 정의당 여성본부장의 총선공약이기도 했던 2차피해방지법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해설] 비동의강간죄, 찬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의당의 비동의강간죄는 민주당의 개정안보다 여성계의 요구를 충실하게 담았다. 그런 면에서 진보적일 수 있지만 국회와 여론을 얼마나 설득할지 의문이다. 미투운동의 힘입어 지난 국회에서 발의한 10건의 비동의간음죄 법안이 법사위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된 것을 보면 비동의강간죄 당위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현가능성에서 회의적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법안 발의가 의미있는 중요한 이유는 다양한 형태와 이유로 성범죄가 발생하는데 상당수 피해자들이 법으로 구제받지 못하고 가해자의 잘못이 아닌 피해자의 태도나 모습에 따라 처벌여부가 달라지는 현실을 진단하고 있어서다. 이에 비동의강간죄를 둘러싼 법기술상 논쟁보다는 비동의강간죄의 문제의식을 국회나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토론해 갈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비동의강간죄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성범죄 처벌을 통해 보호해야 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인격권’의 일부”라며 비동의강간죄의 필요성을 말했다. 전제할 건 성적 자기결정권이 양날의 칼일 수 있다는 점이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위 저서에서 비동의간음죄 한계로 지적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법이 여성의 의지·능력을 폄하한다는 점이다. 즉 폭행·협박이 없는 남성의 성관계 요구에 연약한 여성이 겁을 먹고 응한 것을 인정하자는 논리가 오히려 가부장주의라는 지적이다. 

남성과 여성(혹은 성소수자)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동등하게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사회적 조건에 따라 각자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노동자·흑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고 보장해야 하는 게 맞지만 현실에선 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적 자기결정권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사회가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피해자 입장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지만 피해자에게 ‘왜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현존하는 권력관계를 지운 채 피해자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주장일 수 있다. 

아동과 성관계 자체를 법으로 처벌하는 이유가 꼭 아동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 못하는 열등한 인간으로 봐서일까. 아동의 성과 인격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것에 대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가해자 폭행·협박에 대응한 피해자의 저항정도가 기존 강간죄의 기준이었다가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강간죄 기준으로 변경한다고 해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질까 싶기도 하다. 류 의원은 인터뷰에서 “성범죄는 피해자가 꽃뱀이어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서 발생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런 당위가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왜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느냐’, ‘왜 성관계 이후에도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느냐’ 등과 같은 2차가해가 없어질까도 의문이지만 ‘그게 동의한 것 아니냐’는 쪽으로 2차가해의 무게중심만 바뀔 우려가 있다. 지금껏 강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동의한 것으로 해석해왔고, 사실상 계약서 수준의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동의여부를 의심하는 공격은 계속될지 모른다. 

관련해 성범죄 피해자의 여러 모습에 대한 연구도 더 필요해 보인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에서도 보듯 피해자가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공격을 당했다. 강간피해자가 피해 이후 보이는 모습이 일관되지 않고 기존 사회통념상 합리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유정 변호사는 위의 글에서 “피해자 대부분이 이런 특징을 보인다면 더이상 비정상적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 강간 피해자 유형’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장다혜, 형법상 성폭력범죄의 판단기준 및 개선방안-비동의간음죄의 도입가능성을 중심으로
이유정, 비동의간음죄의 신설에 대한 논의 
한겨레21, 임수희 판사 “자기결정권 넘어 ‘성과 인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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