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윤정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됐다. 윤 위원은 한국여성민우회 재직 시절부터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강화시키는 미디어 속성을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2002년 통합방송법 개정을 통해 “방송은 특정 성을 부정적, 희화적으로 묘사하거나 왜곡하여서는 아니된다”, “방송은 성차별적인 표현을 하거나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장하여서는 아니된다” 등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이 명시됐지만 2004년까지 법 위반 사례는 3건에 불과했다. 윤 위원은 법을 비껴간 미디어 내의 성 차별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2004년 ‘성평등적 관점 방송심의 가이드라인’ 제정에 참여하고 가이드라인 위반 사항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다. 2005년 9월 당시 한국여성민우회 모니터연구부장이었던 윤정주 위원은 지상파 3사 프로그램(162편)을 분석해 ‘성평등적 관점 방송심의 가이드라인’에 어긋난 건수가 115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그는 “출연자 외모를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못생긴 사람과 뚱뚱한 사람을 언급할 때 웃음을 유발시키는 대상으로 삼아 심각하게 조롱한 사례가 많았다”고 꼬집었다. 외모 차별뿐 아니라 흔히 방송에 쓰인 미망인, 올드미스, 과부, 출가외인 등 용어도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라며 구체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단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디어 속 성차별 행태 및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지난 2018년 7월 예능 오락 프로그램(지상파 3사, 종편 4사, 케이블 2개사 대상)을 모니터링한 결과, 출연자 성비는 남성 63.2%, 여성 36.8%로 나왔다.

윤 위원은 2018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들어가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성평등에 무지한 방송 내용과 제작진을 질타하는 그의 지적은 때론 힘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미디어 성평등 문제를 방송심의 제재로 환기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나왔던 ‘이 정도 수준을 갖고 제재하면 안 된다’는 의견에 번번이 막혔다.

▲ 지난해 8월10일 열린 추모식 중 방영된 윤정주 위원의 활동 사진 영상 중 갈무리. 사진=손가영 기자
▲ 지난해 8월10일 열린 추모식 중 방영된 윤정주 위원의 활동 사진 영상 중 갈무리.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해 3월 채널A는 메인뉴스를 통해 가수 정준영이 불법 촬영 영상물을 공유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피해자 신원을 간접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보도했고, 이들의 이름과 신상이 인터넷에 확산됐다. 거센 항의에 부딪히면서 방송분을 삭제하고 사과하긴 했지만 한 방통심의위원은 “이런 것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나. 무엇을 보도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제재에 반대했다. 윤 위원은 채널A 보도로 피해자를 추정하는 것이 가능했다며 미디어 책임을 크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미스트롯’이 공연 도중 자신의 치마를 벗어 던져 수영복 형태의 의상이 드러난 참가자의 모습을 방영했을 때 방통심의위원들은 “이 정도 노출이 문제라면 수영선수, 체조선수는 화면에 나오면 안 된다” 등 문제없음 의견을 냈다. 이에 윤 위원은 홀로 행정지도인 권고 의견을 제기하면서 “마치 물건을 전시하듯 했고…(중략) 시대가 바뀌었다. 미인대회도 문제 제기가 많아서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외로운 싸움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미디어 속 성차별적 요소가 시정되면 한국 사회를 좀 더 젠더 문제에 천착시킬 수 있으리란 신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론 매체 내부에 젠더 이슈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논쟁이 건설적 대안 마련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해 대립을 격화할지 예상키 어렵다. 윤정주 위원이 있었다면 어떤 ‘혜안’을 제시했을지 사뭇 궁금하다. 우리 언론이 젠더 감수성을 강조하면서 그 시선은 외부로만 돌린 건 아닌지 되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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