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성추행·성희롱을 당했다고 언론에 고발했던 피해자가 이 사건에 ‘거짓 미투’ 의혹을 제기한 경향신문 취재 기자에게 “왜곡을 그만 두라”고 밝혔다. 가해자에게 유리한 근거만 취사 선택해 의혹을 제기한 무책임한 보도라는 입장이다. 

문제의 보도는 지난 29일 보도됐다 몇 시간 후 삭제된 “[단독] 박재동 화백 ‘치마 밑으로 손 넣은 사람에 또 주례 부탁하나’ 미투 반박”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기사의 상당 부분이 성평등시민연대(여희숙)와 만화계성폭력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신경순)가 발표한 성명 내용이다. 모두 피해자 A씨가 거짓 진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사건 장소에 대한 피해자 진술이 엇갈리고 △피해자가 성추행을 당한 후에도 박 화백에게 결혼 주례를 재차 부탁했고 △사건 시각에 박 화백은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주장했다. 기사는 이 사건 최초 보도 후 피해자가 지인과 나눈 카카오톡도 공개하며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성 비위 전력이 있는 박 화백은 입신양명해선 안 되며 이 사건이 출세도 막았다는 취지의 사적 대화다. 

▲SBS ‘8뉴스’는 지난 2018년 2월26일 “[단독]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사진=SBS ‘8뉴스’
▲SBS ‘8뉴스’는 지난 2018년 2월26일 “[단독]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사진=SBS ‘8뉴스’
▲29일 오전 출고됐다 삭제된 경향신문 기사.
▲29일 오전 출고됐다 삭제된 경향신문 기사.

모두 법원이 기각한 주장이지만 기사는 판결 내용은 반영하지 않았다. 박 화백은 2018년 5월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최초 보도한 SBS를 상대로 제기한 정정보도 소송 1심에서 지난해 11월 패소했다. 법원은 피해자가 일관되게 진술한다며 신빙성을 인정했고, 오히려 원고 진술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사건 장소를 두고 진술이 크게 바뀐 쪽은 박 화백이다. 그는 소송을 접수할 땐 ‘부천국제만화축제 개막일 점심 때 야외 테라스가 있던 식당’에서 피해자를 만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부터 관련 일정을 확인하자 ‘영상진흥원 근처에서 잠깐 만났고 외부에서 만나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이후 공판에선 또 ‘구체적인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상진흥원 내부’라고 밝혔다. 

이에 비해 피해자 기억 착오는 사소하다. A씨는 2017년 5월29일 한국만화가협회에 처음 제보했을 땐 당일 동선을 ‘커피숍’, ‘택시’, ‘레스토랑’, ‘만화영상진흥원 건물 뒤 곁’의 순서로 썼다. 법원에선 ‘카페’, ‘택시’, ‘만화영상진흥원 건물 뒤쪽’으로 정정해 일관되게 진술했다. 사건은 카페와 택시 안에서 주로 벌어졌다. 사건 시각도 정확한 시각을 기억하지 못할 뿐 ‘오후 경’이나 ‘1시 반에서 2시쯤으로 추측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박 화백 진술 번복엔 “진술 변경 경위에 대해 쉽게 수긍할 만한 이유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피해자 진술에 대해선 “(사건 최초 제보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같은 날 오후경에 박 화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며 장소 착오도 “위 같은 기억 오류만으로 진술자 신빙성이 크게 훼손된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봤다. 

피해자는 이 내용이 마치 은폐됐다가 밝혀진 것처럼 보도된 점에 황당해 하고 있다. 기사가 인용한 자료나 내용 모두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실 비서관인 박아무개씨가 개설한 ‘WITH 박재동 아카이브’ 페이스북 페이지에 2018년부터 꾸준히 게시됐다. 왜곡된 내용으로 피해자를 모욕한 2차 가해성 게시글이 많다. 박씨는 이와 관련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지난 4월 기소됐다. 오는 8월27일 첫 공판이 열린다. 

객관성이란 허울 뒤 ‘피해자다움’ 편견

경향신문 기자는 ‘주례를 재차 부탁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1년 8월 사건 당시 결혼을 앞둔 피해자는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박 화백을 찾아갔다. 그날 오후 카페에서 주례를 부탁하다가 성추행을 당했다. 충격을 받은 피해자는 혼란스럽던 중 같이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여기서 ‘주례 날짜가 되는지 확인해달라’고 다시 물은 것. 

보도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을 깔고 있다. “성추행을 당한 직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주례를 서달라고 다시 말한 것”은 피해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와 달리 법원은 “박 화백 의지에 따라 출국 전전날 주례를 할 여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원고와 친분이 있던 A씨로선 재차 주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A씨도 증인신문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에게 “그 정도로 당하고 나면 멘붕이 된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정말 나 이렇게 한 게 맞나? 내 결혼에 이게 알려지면 어떤 영향을 끼칠까?’ 그 다음 이 사실 자체에서 충격(이 온다)… 판단이 그렇게(명료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A씨가 ‘주례를 재차 요구했다’는 말은 A씨와 박 화백 간 통화 녹음으로 확인된다. 이 녹취록도 1심 재판에서 이미 공개됐다. A씨가 이를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은 이유도 ‘2차 가해’ 때문이다. A씨는 녹취록을 공개하라는 법원 요구에 한국여성민우회 측에 문의했다. 민우회는 “재판 진행에 필요하면 제출하는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유출됐을 시 2차 가해는 100% 일어나니 감안해서 선택하시라”고 답했다. 

A씨는 재판장이 박 화백 측으로부터 유출 금지 약속을 받는 것을 확인하고 증거로 냈다. 그러나 이 내용은 곧 ‘WITH 박재동 아카이브’에 게시됐고 경향신문 기자에게도 전해졌다. A씨는 지난해 5월 법정에서 “이 재판에서 제가 제출하는 증거들이 법원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증거의 부분만 가지고 음모를 제기하거나 불리한 녹취를 싹 뺀 내용을 이용해 나를 거짓말쟁이로 몬다”며 “이 1시간 반짜리 녹취가 나왔을 때 제가 얼마큼 가공할 만한 공격을 당할지 두려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 “가해자 측 허위 주장 그대로 반영”

“사건 시각(당일 오후)에 박 화백이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는 말도 확인되지 않은 박 화백 측 주장이다. 1심 재판부는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론 원고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봤다. 박 화백의 증거는 부천국제만화축제 일정표가 거의 전부다. 박 화백은 카드사용 내역을 증거로 냈으나 법원은 전체 카드소비 내역을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고 봤다. 

각 방송사에 사실조회 신청을 한 결과 일정은 일정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정표엔 오전 11시~오후2시30분(YTN), 오후 1시(MBC), 오후 2시30분(KBS) 순서로 적혔다. MBC 기자는 이에 ‘오전 11시30분부터 12시30분 사이 10분 정도 인터뷰했다’고 기억했다. YTN 측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현장을 담고 참가자 인터뷰 등을 진행했는데 박 화백 인터뷰는 도착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약 30분 정도 진행했다’고 추정했다. 오후 중 공백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법원은 “일정표는 대략적 시간만을 표시한 걸로 보이고 실제 해당 시간에 박 화백 인터뷰가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표가 정확하다 해도 오후 2시30분경부터 오후 6시20분경까지는 인터뷰 일정 등이 없었다. 박 화백은 적어도 오후 2시30분경부터 오후 5시경 사이 피해자를 만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 내용은 경향 보도에 반영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자신의 입장이 담긴 10쪽 길이 설명문과 함께 1심 판결문, 자신의 증인 신문 녹취록 등을 취재 기자에게 보냈다. 기사엔 원고지 5매 분량의 ‘1문 1답’ 인터뷰 글로 기사 뒷부분에 첨부됐다.

기사는 경향신문 내 성범죄 관련 보도준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지침엔 ‘피해자 삶을 가부장적 성문화의 시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거나 ‘남성중심적, 가해자 중심적 용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성범죄 원인을 분석할 때 가해자 개인 문제뿐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해당 기자는 이와 관련 자신의 SNS에 “성범죄가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서로 팽팽히 엇갈리거나 누구 말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 기계적 중립보다 피해자 중심 보도라면 이해가 간다”며 “또한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막연한 추측과 짐작으로 피해자 주장에 의심을 하는 건 2차 가해에 해당하는 보도가 맞다”고 반박했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의 말을 들어보고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혹은 진실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지 판단해서 진실 중심으로 보도해야 하는 게 원칙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피해자 A씨는 이에 “1심 판결문을 포함해 법정에서 내가 어떻게 증언했는지를 보여주는 녹취록도 다 드렸다. 그런데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가해자 측 허위 주장은 그대로 반영했다”며 “기사 내용은 ‘WITH 박재동 아카이브’에서 2년 전부터 재판 과정 내내 작성돼온 2차 가해물 들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성폭력 문제를 대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가 여성들이 (성차별적) 문화적 압력을 강하게 받다 보니 폭력 피해를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대응까지 나서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아는 것이다. 이후 피해 경험을 인지해 고발하는 것 자체를 ‘프레임을 짜서 엮는다’고 보는 시각은 이런 인식을 결여한 것”이라며 기사 일부 내용을 비판했다. 

김 교수는 “객관성을 강조한다면, 해당 보도는 드러난 사실관계를 충분히 반영했는지, 양측 입장이 충분히 반영됐는지 등도 볼 필요가 있다”며 “(기사가 상반된 주장을 다룬다면) ‘증거 다툼이 있다’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규정은 다르다. 증거 다툼이 있을 때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사실로 뽑아버리면 그건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피해자 중심 보도 준칙과 관련해 “기자가 성폭력 사건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오랜 가부장적 사고,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등의 2차 가해적 관점이 반영될 수 있다”며 “양측의 말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고 하지만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강제추행 사건 보도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전제하고 사실을 선택적으로 보도하는 폐해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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