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에 성범죄자·살인자·아동학대범 등 흉악범 신상을 공개해 논란이 된 ‘디지털 교도소’ 개설자는 스스로를 “사실적시 연쇄 명예훼손범”이라 칭했다.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을 공개하는 웹사이트 ‘배드파더스’는 명예훼손 재판 1심에서 승소한 뒤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사실을 밝혀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는 이른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21대 국회가 폐지하라는 요구가 시작됐다.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오픈넷·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주최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적 보호를 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개정방향’ 토론회가 열렸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부각된 사례 중 하나는 ‘미투’(#MeToo) 운동이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성폭력 가해자들은 고발자들이 명예훼손으로 처벌받는 것을 목표로 한다기보다 본인들에 대한 폭로를 초기에 진화하는 수단으로 명예훼손 고소를 남발하고 있다”며 “이는 미투 외에도 기업의 비리, 상사의 갑질, 권력자의 부정행위 등을 내부고발하고 공론화시키는 과정에서 다수가 겪고 있는 폐해”라 밝혔다.

실제로 임금체불 사장에게 ‘각성하라’며 현수막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 노동자, 제약회사 대리점에 대한 갑질 내부고발자와 같은 피해자들이 유죄 판결 받은 사례가 알려진 바 있다. 산후조리원 이용자가 포털 카페에 조리원 측 대응을 지적한 글, 국립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제자를 성추행했다고 밝힌 여성단체의 글 등도 유죄 판결됐다가 최종심에서야 무죄를 인정 받았다.

▲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오픈넷·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주최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적 보호를 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개정방향’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전민 대학생 기자
▲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오픈넷·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주최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적 보호를 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개정방향’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전민 대학생 기자

이는 언론 보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8년 한국언론재단진흥재단 조사 결과 기자 3명 중 1명은 취재·보도로 소송을 겪었고, 소송의 약 80%는 명예훼손 사안으로 나타났다. 2명 중 1명은 상대방으로부터 ‘고소하겠다’는 말을 듣고 후속보도를 자제한다고 답했다. 유독물질이 나온 식품·화학제품이나 비위생적 식당, 의료사고가 난 병원 등에 대한 ‘익명보도’가 기본 원칙처럼 이어지는 양상도 그 일환이다.

손 변호사는 “형사처벌 우려 때문에 가해자 특정 없이 비위사실을 폭로하면 이를 저지른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면하는 반면 선량한 주변인들이 억울하게 오해를 받을 수 있게 되고, 폭로를 한 피해자에게 오히려 조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의 화살이 다시 돌아간다”며 “처음부터 가질 자격이 없는 ‘허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폭로자, 제3자, 국민의 권리와 법익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균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법익균형성을 위반하는 위헌적 법률”이라 주장했다.

국제적으로도 명예훼손의 형사범죄화를 폐지하는 추세다. 미국·독일·프랑스 등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두지 않고 있다. 유엔(UN)에서는 2015년 자유권 규약 위원회와 2011년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우리 정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연례인권보고서 한국편에서 진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는 현행법 규정 폐지 여부가 현 정부의 인권 수준 척도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손 변호사는 ‘공연한 사실 적시’가 아닌 ‘타인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사실 적시’로 처벌 대상을 좁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공적 인물의 자질·도덕성·청렴성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 ‘진실로 믿은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로 처벌 예외를 둬야 한다고 봤다. 나아가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징역형’을 폐지하고, 명예훼손죄를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 불가)에서 친고죄(피해자 고소·고발이 있어야 공소 가능)로 개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오픈넷·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주최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적 보호를 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개정방향’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신하은 대학생 기자
▲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한변호사협회·㈔오픈넷·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동작을) 주최로 ‘프라이버시와 표현의 자유의 균형적 보호를 위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개정방향’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신하은 대학생 기자

대한변호사협회 소속의 김한규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징역형’ 폐지는 이른 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행법이 타인의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사실을 적시한 경우로 개정될 경우 동일한 피해자에게 범죄를 반복한 자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형벌 최대치는 벌금 500만원”이라며 “징벌적 손해배상과 상습범을 신설해서 징역형을 두지 않는 한 본죄의 징역형 폐지는 섣부른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법조 실무에서 형벌의 위하력(威嚇力·무서운 형벌로 범죄 예방하는 힘)이 그다지 크지 않을 뿐 아니라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도 인정되는 손해배상액수가 높지 않다. 언론의 경우 지난 10년 간 언론 보도 이후 명예훼손을 주장하며 언론사 상대 민사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경우 인용액은 1946만4000원에 불과하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주장을 거듭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이수진 민주당 의원은 토론회 내용을 반영해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 의원은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동시에 사생활 보호의 기능을 하도록 하는 법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며 “여러 고견을 취합하고 두 헌법 가치를 균형 있게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법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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