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봐도 고 박원순 시장 실종과 사망 과정에서 많은 언론과 유튜브 방송들이 보여준 모습은 끔찍했다. 당시 충격 속에서도 복잡하고 애타는 심경으로 언론 보도를 찾아보며 느낀 것은 ‘조회수를 높일 좋은 기회가 열렸다’는 흥분과 기대였다. 속보와 단독 경쟁 속에 8시간 동안 2천400건의 관련기사가 생산됐고, 온갖 자극적인 기사와 오보들이 쏟아졌다. 특히 사망 오보들은 실제로 사망을 기대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자살과 성폭력에 대한 보도준칙들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게 살을 붙이고 제목을 달아서 클릭장사에 나섰다. 자살의 구체적 방법과 주검의 상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과 시신의 운반 장면까지 생중계로 나왔다. 그런 기사들에 달린 수많은 광고들과 방송 도중 유튜버들의 슈퍼챗 홍보는 잔인하게만 보였다.

특히 심각한 것은 많은 언론과 기사들이 양극단의 반응이나 발언들을 부각하고 불필요하게 세부적인 내용을 보도하면서 논란과 대립, 2차피해들을 유발하며 진영간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양태였다. 그것은 이 사안을 지나치게 정쟁화하면서 피해자(고소인), 고인(피의자), 유가족 모두를 존중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방식이었다.

▲ 최익수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이 7월10일 오전 서울 성북구 와룡공원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최익수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이 7월10일 오전 서울 성북구 와룡공원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도 수구언론과 우파 정치세력들은 죽음과 성폭력 사건까지 클릭장사와 정적 공격의 수단삼는 태도가 노골적이다. 이들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수호하고 2차가해를 철저히 방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에서 진정성보다는 기가 막힌다는 생각만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저 고인과 민주당을 괴물로 만드는데 열심이다. 자신들이 그 중요한 일부인 성폭력적 사회구조,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별 고민과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성폭력을 일부 괴물같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문제로, 따라서 그들만 단죄하고 도려내면 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저들만이 아니다. 그 정반대편에서 고인을 적극 옹호하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이들도 사실은 같은 늪에 발을 걸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성폭력 가해자는 괴물인데, 우리가 존경하던 고인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태도가 느껴지는 것이다.

성차별적 사회구조,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서 아무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진보적 정치인도 얼마든지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미투운동 초기에 안희정 사건에서 특히 반발과 백래시가 심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미투에 호응하여 위드유를 외치던 사람들도, 진보적이고 성평등을 주장하던 안희정이 가해자로 드러나자 총격과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피해자(김지은)가 박근혜 정부 시절부터 공무원이었던 것을 근거로 보수진영의 정치적 음모라는 제기도 나왔다. 이것은 타인이나 경쟁진영(세력)의 잘못과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진영(세력)의 잘못과 문제를 객관화해서 직시하고 엄격하게 비판하는 게 훨씬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준다.

남을 욕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게, 멀리있는 가해자를 비난하기보다 가까이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가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더 어렵다. 그래서 진보진영과 운동사회 내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항상 해결이 어렵고 불신과 갈등으로 연결돼 온 것이 사실이다.(대표적으로 좌파단체인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의 요구와 결정에도 아직도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나 자신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운동단체들의 잘못된 대응을 강하게 비판해 왔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사건이 벌어질 때 항상 잘 대처해 왔고, 대처할 것이라고 자신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지금, 일부 사람들이 보이는 부적절한 태도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것들은 있다. 피해자의 변호인과 지원 여성단체들을 비난하고 이 사건과 상관없는 과거 전력까지 끌고 와 문제삼는 것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변호인과 여성단체들이 불순한 의도로 피해자를 이용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피해자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들은 대부분 2차피해를 주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1차피해가 확실하지 않은데 무슨 2차피해냐는 반론은 옳지 않다. 대부분의 2차가해가 바로 ‘그게 무슨 성폭력이냐, 당신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폭력 피해 호소를 무조건 불신하며 불순한 의도로 몰고 신상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2차가해다. 성폭력에 잘못 대응해 온 많은 사람들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개 그들은 피해자의 호소를 불신하면서 거짓말쟁이, 불순한 의도와 공작으로 몰았고 평판과 행실을 문제삼았다. 여성단체들은 피해자의 주장만을 근거로 사건 자체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먼저 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무조건 불신하며 괴롭히는 것 자체가 가해이고 잘못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따라서 2차피해를 일으키는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단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2차피해를 주의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2차가해를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변호사와 지원 여성단체들이 피해자의 말만 믿고 고인을 가해자로 몬다고 불평하는 것도 억지스럽다. 피해 사실과 증거를 갖고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듣고 변호를 맡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편에서 주장하고 피해가 사실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등이 진행 중인데 피의사실과 증거를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언론-검찰의 피의사실 유포를 비판했던 것에 비추어도 그렇다.

또 검찰개혁, 언론개혁 문제에서 오래동안 그것을 연구하고 투쟁해 온 여러 (남성)전문가들의 분석과 주장을 신뢰하듯이, 성폭력 문제에서도 오랜 경험과 연구를 해 온 여성단체들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 여성단체들이 충분한 근거나 확인도 없이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고인과 민주당을 공격하기위해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을까? 전혀 설득력도 없고 상상도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물론, 수구언론들과 미통당 등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사안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어떤 인간적 존중도 없이 고인을 괴물과 악마로 만들어버리면서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려 애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피해자의 변호인과 여성단체들도 그것을 돕고 있는 허수아비들로 몰아갈 이유나 불신과 갈등 조장에 호응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마치 검찰이 라임, 옵티머스 사태를 정부 공격의 카드로 이용하려 한다는 이유로, 그 사건들에 실제 연루된 민주당 인사의 비리와 잘못을 부정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일 것이다. 서울시와 민주당도 ‘2차가해는 안 되고 피해자에 공감하고 위로를 전한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전혀 바람직하지도,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미투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변화가 없는 현실을 함께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왜 여전히 성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많은 의심과 질문이 쏟아지는지, 피해자는 무엇이든 다 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지, 여성의 고통과 상처보다 남성의 명예와 커리어가 더 중요시되는지 물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생을 걸 각오 없이는 누구도 쉽게 피해를 말하지 못할 것이다.

▲ 2018년 3월8일 여성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미투(Metoo)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2018년 3월8일 여성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미투(Metoo)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그것이 성폭력 사건을 신고율, 기소율, 유죄 판결 비율도 가장 낮은 범죄로 만들고 있는 이유이고, 범죄 신고라는 상식이 ‘(미투)혁명’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유다. 그리고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왜곡된 비판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의 경험과 성과로부터 배우려고 해야 한다. 예컨대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절대주의’라는 식의 왜곡과 곡해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사람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음과 같이 오해하고 있다. 첫째, 피해자에게 사건에 대한 판단기준 전체를 위임하기. 둘째, 피해자에게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셋째, 피해자에게 피해 경험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기. 세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의 주관적 느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화의 의무를 지게 된다. 페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석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언어가 아니다.(<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피해자 중심주의는 다만 어떤 불편함과 위력은 젠더위계와 사회적 직위가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별개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잘 보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울시 최고위직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말단 하급직원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가.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거나 어쨌든 여자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역사 속에 피해 경험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왔으므로, 성희롱 피해에 대한 판단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위치에서, 상사에 비해 신입 직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편이 더 정의롭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뜻이다.”(위의 책)

그러한 관점에서 진상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왜 이러한 위계와 위력이 나타났는지 그 구조를 드러내 더 이상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왜 공직사회에서 ‘상사의 심기보좌와 의전’이 하급(여성)직원들의 업무로 고착해 돼 왔고, 문제제기와 시정조치는 가로막혔던 것인지를 밝히고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성폭력은 그 어떤 사안보다도 더 단지 악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가해자 처벌로만 갈등을 다룰 때, 가해자의 처벌이 끝난 자리에는 또 다른 가해자가 들어올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위의 책)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괴물로 만들어 잘라내는 것은 페미니즘과 반성폭력 운동의 관심도 목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한다’는 희망은 ‘더 이상 당신같은 가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희망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를 변혁해서 우리 모두를 위한 신뢰와 정의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지금 더욱 더 많은 페미니즘, 반성폭력 운동, 미투와 위드유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