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선 가구당 공영방송 수신료로 한 달에 17.5유로(약 2만4500원)를 의무적으로 낸다. TV나 라디오가 없어도 내야 한다. 외국인도 낸다. 1인 가구도 17.5유로, 5인 가구도 17.5유로다. 저소득층·장애인 등은 면제 또는 할인받는다. 물론 독일에 수신료를 내기 싫은 사람은 있다. 하지만 2018년, 독일 헌법재판소는 언제 어디서나 공영방송 콘텐츠에 접근 가능하며 직·간접적 영향을 받는다면 실제 접근 여부와 상관없이 돈을 내야 한다고 결론 냈다. 공영방송을 공공 인프라로 판단한 결과다. 

독일 공영방송은 수신료 사용 내역을 상세하게 공개한다. 17.5유로 중 ARD에 3.92유로, ZDF에 4.25유로, 지역 공영방송에 8.39유로, 독일 공영라디오에 0.50유로, 민영방송 허가 및 규제를 담당하는 주미디어청에 0.33유로가 책정된다. 지역 공영방송에 가는 8.39유로 중 TV제작국이 받는 수신료는 3.1유로이며 이 중 정치·사회 1.61유로, 문화·교양 0.34유로, 영화 0.17유로, 예능 0.47유로, 스포츠 0.13유로 등으로 분야별 예산이 책정돼 있다. 

독일은 코로나19 국면이던 지난 3월 수신료를 18.36유로(2만5700원)로 인상했다. 오는 2021년부터 인상액이 적용될 예정이다. 인상된 수신료 86센트는 16인의 독립인사로 구성된 ‘공영방송 재정수요 산정위원회’(KEF) 판단에 따라 ARD 47센트, ZDF 33센트, 도이칠란트 라디오에 4센트 분배하고, 민간 방송을 관리·감독하는 주 미디어 당국에 2센트를 분배하기로 했다. 

▲독일 공영방송 ARD의 '타게스샤우' 방송 화면 갈무리.
▲독일 공영방송 ARD의 '타게스샤우' 방송 화면 갈무리.

2018년 독일 공영방송 수신료는 80억 유로(약 10조6000억원)다.공영방송 재원의 80% 이상을 수신료가 차지한다. 광고 수익은 6~10%로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한다. 한국은 어떨까. KBS는 2018년 6595억원, EBS는 180억 원의 수신료를 받았다. 수신료 규모가 독일의 6.4% 수준에 불과하다. 2018년 기준 KBS 공적 재원 비중은 46.9%였다. 

우리는 독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독일 사례를 통해 수신료를 둘러싼 사회학적 상상력을 가져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껏 TV수상기 중심으로 공영방송 수신료 개념을 설정해왔다. 수신료는 ‘공영방송사업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경비조달을 위해 수상기를 소지한 특정 집단에게 부과하는 특별부담금’(헌법재판소, 1998)이었다. 1994년 전기세에 통합 징수되면서부터는 준조세 성격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제는 TV수상기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IPTV 유료방송 가입자 입장에선 TV수상기 개념의 수신료 때문에 요금을 이중으로 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지금껏 수신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공영방송 전문가인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는 “수신료는 단순한 공적 재원이 아니라 공영방송과 시청자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사회계약의 중요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껏 수신료를 사회계약으로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한쪽은 당연히 내야만 하고, 한쪽은 당연히 받는다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국민이 공영방송을 지지하고 공영방송은 국민에게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책임 있는 연결이 필요하며, TV수상기가 반드시 그 연결고리가 될 필요는 없다. 

▲디자인=이우림 기자.
▲디자인=이우림 기자.

‘없으면 불편한 존재. 없어선 안 되는 존재.’ 공영방송은 그렇게 정의되어야 하고, 공영방송 구성원들은 수신료를 매개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기 위해 자신들이 사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택해야 한다. 예컨대 KBS의 뉴스는 해외의 경쟁력 있는 공영방송에 비해 왜 권위가 떨어지는지, 왜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는지, 혹은 국내 다른 방송뉴스와 왜 차별성이 없는지 깊이 자문해야 한다. EBS는 단순히 공교육 보조개념을 넘어서서 재취업·평생 교육까지 책무를 넓혀나갈 수 없을지 고민해야 한다. MBC 또한 SBS 또는 JTBC와 다른 어떠한 차별화된 콘텐츠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면, 아쉽지 않다면 사회적 계약관계는 없는 셈이다. 

수신료 개념도 사회계약의 관점에서 달라져야 한다. 수신료는 공영방송 콘텐츠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공영방송에 내 돈을 더 많이 줘야 공영방송이 나를 위해 일한다는 관점, 수신료가 있어야 공영방송은 계속 공영방송일 수 있다는 관점이 서야 한다. 이를 위한 사회적 논의와 설득의 작업이 끝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치적 국면을 이용해 수신료를 인상하려 한다면 영원히 인상할 수 없다. 여당은 영원히 올리려 하고, 야당은 영원히 반대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KBS는 2011년 2월 1000원 인상 및 광고 유지안이 국회에 냈고, 2014년 3월 1500원 인상 및 2012년 대비 광고 2100억원 축소안을 국회에 냈다. 하지만 모두 폐기됐다. 최근에도 KBS가 향후 수신료 현실화 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밝혔지만 구체적 조정안을 제출하진 않은 상태다. KBS에게 수신료 이슈는 ‘꼭 지나가야 하지만 지나가지 못하는 늪’ 같다. 걸어가다 발이 더러워진 채 원위치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 늪에 ‘사회계약이라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 

▲KBS.
▲KBS.

이 같은 내부 논의와 동시에, 외부에선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한상혁 방통위원장은 지난 20일 인사청문회 서면질의 답변서에서 “수신료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신료와 다른 수익의 회계를 분리하고 수신료의 사용계획과 내역을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수신료 제도의 합리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가 중심의 수신료 위원회 설치, 재원의 안정성 보장을 위한 인상기준 마련, 물가연동제의 도입 등은 검토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당장 필요한 변화들이다. 

앞서 2017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은 정책공약집에서도 “시청자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수신료위원회(가칭)’를 설치해 공정하고 투명한 수신료 산정·징수·배분 등 관리·감독 강화”를 명시했다. 정부는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 지금처럼 정부·여당이 수신료 집행구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달라지려면, 독립적인 수신료 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인상기준을 법제화해 공영방송 운영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 여당이 진정 KBS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 없다면 이 같은 변화를 국회에서 주도해야 한다.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한국언론정보학회, 한국PD연합회 등 31개 단체가 참여한 미디어개혁시민네트워크가 최근 미디어정책보고서를 발간했다. 일부 내용을 두고 방송사 구성원들 간 갈등 조짐이 보인다. MBC를 공영방송으로 규정하고, 수신료 산정위원회(가칭)를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한 대목이 발화점으로 보인다. 이런 갈등이 시청자 눈엔 어떻게 비칠까. 지금은 ‘수신료’를 새롭게 정의하고 ‘공영방송’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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