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들 사이에서 신망 받던 고연차 기자가 수차례 논설위원 재임 불발을 겪고 회사를 떠나자 구성원 사이에서 경영진 행보를 원인으로 지목하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주요 직책에 여성 비율이 극도로 낮은 상황에서 회사에 쓴소리를 해온 여성 최고참 기자가 장기간에 걸쳐 사실상 사내 의사결정에서 배제돼 왔다고 지적한다. 후배 기자들 중심으로 연이어 성명을 냈다.

이희정 전 한국일보 미래전략실장은 지난달 15일 회사 구성원들에게 짤막한 이메일을 보내고 퇴사했다. 이희정 전 실장은 2014년~2016년 논설위원을 맡다가 2017년부터 미디어전략실장을 임했다. 이 전 실장은 한국일보 내 최고선임 여성 직원이었다. 내부 구성원에 따르면 이 전 실장은 2020년을 목표로 디지털전략 보고서를 만드는 등 회사 차원의 미디어전략을 세우는 한편, 사측에 수차례 논설위원 재임 의사를 밝혔고 사측에 의해 고배를 마셔왔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이 실장 퇴사가 회사의 ‘바른말 하는 직원’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업무 배제의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이 전 실장은 미디어전략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 즈음부터 소속 직원 없이 배치돼 일했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논설위원 불발 때마다 내부에는 ‘평소 입바른 소리를 해서 반려됐다’는 풍문이 돌았다. 복수 관계자는 이 전 실장이 그간 회사가 답변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구성원을 대표해 회사의 입장을 묻고 고언하곤 했다고 전했다.

이 전 실장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내 주요 결정 과정에서 한층 소외됐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일보 내 여성 고참 직원이 매우 적은 조직 구성을 볼 때 유일한 여성 고참이었던 이 전 실장을 배제하기 더 쉬웠을 거란 추측이다. 한국여기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일보 내 임원 3명과 본부장·국장급 5명, 부본부장·부국장급 4명 등 12명 가운데 여성은 1명에 불과했다.

▲한국일보 여성 기자와 PD 59명은 지난 13일 오전 한국일보 편집국에 ‘이젠 우리가 이희정이다’라는 연명 자보를 붙이고 회사가 여성 최고선임 직원인 이희정 전 미래전략실장을 장기간 의사결정에서 배제해 퇴사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차장급 기자들도 ‘이희정 선배를 떠나보내며’라는 이름의 입장문을 냈다. 사진=김예리 기자
▲한국일보 여성 기자와 PD 59명은 지난 13일 오전 한국일보 편집국에 ‘이젠 우리가 이희정이다’라는 연명 자보를 붙이고 회사가 여성 최고선임 직원인 이희정 전 미래전략실장을 장기간 의사결정에서 배제해 퇴사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차장급 기자들도 ‘이희정 선배를 떠나보내며’라는 이름의 입장문을 냈다. 사진=김예리 기자

16년차 차장급 기자 4명은 지난달 30일 ‘이희정 선배를 떠나보내며’란 제목의 연명 자보를 붙였다. 이들은 대자보에서 “회사는 그 선배가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떠날 자리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며 “이유는 뻔하다. 우리에게 그는 회사에, 소위 ‘윗분들’에게 고언과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던 선배였다”고 했다. 이들은 이 전 실장이 주도해 만든 2020 미래전략 보고서가 특별한 이유 없이 사문화되고, 이후 사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거듭된 최고위층 면담 요청도 거부된 점을 열거하며 “철저한 외면과 배제”라고 했다.

이들은 “(이 선배는) ‘기업으로서 한국일보’가 아닌 ‘언론으로서의 한국일보’, 곧 저널리즘의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깊게 고심해왔던 선배”라며 “회사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그러한 고민을 풀어 놓을 수 있는 자리도, 역할도, 기회도 주지 않았다. 17층 구석진 곳의 책상과 의자, 허울뿐인 직함, 월 1회 정도의 칼럼난이 전부였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책임은 사람의 능력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방치한 회사에 있다”며 “(앞으로는) 조직원에 부당한 처사가 취해질 때 적극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

한국일보 소속 여성 기자와 PD 59명도 13일 오전 ‘이젠 우리가 이희정이다’라는 제목의 연명 자보를 붙였다. 연명한 직원 일동은 “부당한 힘이 지난해 이희정 선배의 논설위원실 진입을 막고, 누구보다 먼저 디지털 전략을 고민한 그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한 것을 알고 있다”며 “회사는 그(이희정 선배)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최근 수년간 제대로 역할을 할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입바른 소리 하는 여기자는 불편하다며 배척되기 일쑤였다”고 했다.

이들은 “후배 몇몇은 부당하다고 외쳤다. 몇 차례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후배들은 무기력을 학습했다”며 “그를 롤모델로 삼은 많은 여기자들은 ‘이 조직에서 내 미래는 있는가’라는 근본 회의를 떨치기 어렵다”고 했다. 성명은 “한국일보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본인을 던질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변변한 역할을 주지 않은 채 조직에서 고사시키는 것을 보고서도 침묵했던 지난날을 후회한다. 이제 틀린 건 틀렸다고 분명히 말하겠다”며 끝맺었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 편집국 유리문에 붙어 있는 2개의 자보. 한국일보 여성 기자와 PD 59명은 지난 13일 오전 한국일보 편집국에 ‘이젠 우리가 이희정이다’라는 연명 자보를 붙이고 회사가 여성 최고선임 직원인 이희정 전 미래전략실장을 장기간 의사결정에서 배제해 퇴사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차장급 기자들도 ‘이희정 선배를 떠나보내며’라는 이름의 입장문을 냈다. 사진=김예리 기자
▲1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 편집국 유리문에 붙어 있는 2개의 자보. 한국일보 여성 기자와 PD 59명은 지난 13일 오전 한국일보 편집국에 ‘이젠 우리가 이희정이다’라는 연명 자보를 붙이고 회사가 여성 최고선임 직원인 이희정 전 미래전략실장을 장기간 의사결정에서 배제해 퇴사를 불러왔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차장급 기자들도 ‘이희정 선배를 떠나보내며’라는 이름의 입장문을 냈다. 사진=김예리 기자

채지은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지부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한국일보 임원과 국장, 부장급 등 주요 포스트 성비 불균형이 타사 대비 심각한 수준이다. 작년에도 민실위 소식지에서 ‘한국일보에 여기자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여성 기자들의 좌절감이 큰데, 이희정 선배의 퇴사로 ‘능력 있는 고참 여기자도 발탁되지 않는 한국일보 조직문화’에 문제의식이 더 커서 대자보까지 붙는 상황이 왔다”고 말했다.

최진주 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장은 지난달 말 발행한 노보 칼럼에서 “30년 동안 다방면에 성과를 보이고 후배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던 선배가 또다시 회사를 떠났다. 모두 놀랐지만 고참 여성 기자가 극히 드문 한국일보 현실에서, 특히 여성 조합원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최 지부장은 “근로자에게 업무를 부과하지 않거나 능력과 경험과 무관한 업무를 부과해 성과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직장 내 괴롭힘 유형 중 하나”라며 “회사는 구성원들이 절망적으로 외치는 목소리에 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영성 한국일보 사장은 미디어오늘 질의에 “(이 전 실장이) 사표 내는 데에 관여하지 않아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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