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2공영방송사 ZDF에서 10년 넘게 일한 비르테 마이어 PD. 실력을 인정받으며 데스크로도 일했지만 정규직이 아닌 고정 프리랜서였다. 법적으로는 ‘유사 근로자’라는 요상한 이름을 달고 있다. 한 곳에서만 임금을 받으며 정규직처럼 일하면서도 사회보장보험이나 비용 처리는 스스로 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고용 형태다.
 
독일 언론 분야에서 자주 보이는 프리랜서 고용까지는 넘어갈 수 있었다.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건 임금 격차였다. 독일기자협회에 따르면 여성 저널리스트의 월급은 평균 2400유로(세후, 약 323만원), 남성 저널리스트는 3150유로(세후, 약 424만원)로 조사됐다. 승진해서 데스크가 되는 남기자가 훨씬 많고, 여기자들이 육아휴직 등으로 인한 경력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력의 차이로 인한 임금 격차는 당연한 부분이다. 문제는 같은 일을 하는 경우에도 성별에 따른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마이어도 같은 일을 하는 남성 동료들보다 월급이 적다는 걸 알게 됐다.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ZDF 사옥. ⓒ정철운 기자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ZDF 사옥. ⓒ정철운 기자

ZDF 상대로 임금 차별 소송…‘차별에 차별을 더한’ 판결로 패소  

 마이어 PD는 ZDF에 임금 격차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2015년 그는 베를린 노동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독일 공영방송을 상대로, 고용주를 상대로 5년간 이어진 지난한 소송의 시작이었다. 마이어는 같은 부서의 남성 동료들과 동일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서 남성 동료들과 비교해 이때까지 덜 받은 임금 8만 유로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마이어는 같은 부서에 있는 남성 동료 12명의 임금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들은 경력이 대동소이하거나, 더 적은 경우에도 자신보다 월급이 높았다. 마이어는 데스크 중 유일하게 임금 등급이 낮게 책정되어 있었고, 우연히도 마이어만 여성이었다. 그는 이를 두고 구조적 차별이라 주장했다. 마이어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탐사보도 방송 ‘Fronta21’를 만들며 언론상도 수차례 받았다. 업무 성과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기자였다. 

하지만 ZDF는 “성별이 아니라 학력과 경력, 업무 성과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며 “성차별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베를린 노동법원은 “정규직과 프리랜서의 임금을 비교할 수는 없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남녀 임금 격차 문제를 제기했는데, 프리랜서 신분이라서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차별에 차별을 더했다.
 
2심이 이어졌다. 마이어 측은 당시 상사였던 국장의 차별적 언행을 공개했다. 국장은 “정치 저널리즘에서 여자들은 찾을 수 있는 게 없다”거나 “데스크에 여자는 최소한으로 있어야 하고 프리랜서라도 남자가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의 한 모임에 여성만 참석했을 때는 “아무도 없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2심 결과도 패소였다. 주 노동법원은 2019년 2월 “마이어가 월급을 덜 받는 게 성별 때문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ZDF 손을 들어줬다.

남녀 임금 격차로 소송을 거는 여성은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이라는 것을 본인이 직접 증명해야 한다. 동료 기자의 임금이나 책정 기준을 알지 못한 채, 또 그 어떤 고용주도 임금 책정 기준에 ‘성별’을 명시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증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2017년 ‘임금투명화법’으로 맞서다…“프리랜서도 임금 정보청구권 있다“

한창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17년 7월, 독일에서는 ‘여성과 남성 간 임금구조투명성 증진에 관한 법률(이하 임금투명화법)’이 시행됐다. 직원 200명 이상 기업의 직원들은 동료의 임금에 대한 정보청구권을 가진다. 정확히 누가 얼마를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직접 지정한 동료들의 평균 임금과 임금 책정 기준을 알 수 있다. 500명 이상 기업은 정기적으로 임금 구조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해야 한다. 

마이어 기자는 이 법률을 근거로 동료 직원들의 임금을 공개하라고 추가로 요구했다. 여기에서는 또다시 프리랜서 신분이 장벽이 됐다. 2심 법원은 “임금투명화법은 정규직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프리랜서는 정보청구권이 없다”고 판단했다. 주노동법원은 성차별 판결에 대해서는 상소를 불허했지만, 이 해석에 대해서만 상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신생 법률로 법원의 해석을 요구하는 첫 번째 소송이었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당연히 상소했다. 

연방노동법원은 지난 6월25일 마이어와 같은 고정 프리랜서도 정규직과 같이 동료 임금에 대한 정보청구권이 있다고 판결했다. 유럽연합법의 해석에 따라 ‘근로자’와 ‘유사 근로자’는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남녀 임금 차이에서 시작한 소송은 프리랜서의 권리문제로 확대됐다. ‘임금투명화법’은 남녀 동일임금을 현실화하기 위한 법률이었지만, 이번 판결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논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법조계는 프리랜서 직종이 많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어 유의미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마이어는 ‘심층 취재’를 통해 이미 동료 임금을 알고 재판에 임했다. 하지만 정확한 임금 책정 기준은 알 수 없었다. 마이어는 정보청구권을 행사하고, 그 정보를 근거로 남녀 임금 격차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게 됐다. ZDF는 이제 마이어보다 경력이 적은 남성 기자가 왜 더 많은 월급을 받는지 그 기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탐사보도 부서에서 일하던 마이어는 이 소송으로 스스로 뉴스의 중심에 섰다. 5년간 소송을 거치면서도 본래 일하던 프로그램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법원이 퇴직금을 받고 퇴사하는 것으로 합의를 중재하기도 했지만, 마이어는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탐사보도 PD로서 이때까지 늘 해오던 방식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