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에 직면한 정부가 흔히 내놓는 대책이 ‘대기업 투자 활성화’ ‘규제혁신’이다. 대기업의 벤처·스타트업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며 삼성·SK·LG와 같은 일반지주회사가 벤처캐피털(CVC)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는 논의도 그 일환이다. 벤처투자가 미진한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 규제완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여론이 분분한 가운데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CVC 규제완화를 촉구하는 토론회가 열린 지 얼마되지 않아 우려점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돼 이목이 집중됐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벤처캐피털(CVC) 규제완화는 혁신인가? 재벌특혜인가?’ 토론회를 주최했다. 박 의원은 “저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의 벤처투자를 촉진시키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투자촉진 방법이 과연 일반지주회사의 CVC 설립 허용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고, 2018년 재계에서도 사실상 현행 제도로도 벤처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다고 의견을 낸 바 있기 때문에 토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취지를 밝혔다.

CVC(Corporate Venture Capital)는 일반기업이 재무적 이익 뿐 아니라 사업확장이나 신시장개척 등 전략적으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을 의미한다. 현행법으로도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가능하다. 다만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지주회사가 직접 CVC를 갖지 못하도록 막아뒀는데 이 빗장도 풀자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벤처캐피털(CVC) 규제완화는 혁신인가? 재벌특혜인가?’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벤처캐피털(CVC) 규제완화는 혁신인가? 재벌특혜인가?’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토론회 발제를 맡은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산분리 규제를 깰 수 없다. 이는 또 다른 특혜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피라미드식 지배’를 가능케 하는 지주회사체제 자체가 특혜인 데다 CVC까지 갖게 하는 것은 “특혜를 ‘더블’로 달라는 것”이라는 논리다. 전 교수는 지주회사체제에서 CVC를 설립하려면 ‘비금융회사로서의 속성’이 강한 경우에 한해 내부자금으로만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회삿돈으로만 투자하라고 하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구글도 그렇게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구글벤처스는 지주사 알파벳의 완전 자회사이고 구글벤처스 투자펀드에는 알파벳이 100% 자금을 투자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일감 몰아주기’, ‘편법승계’처럼 재벌 총수가 연관된 불공정 거래를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대기업 지주회사가 만든 CVC는 총수가 지분이 있는 기업에 투자할 수 없도록 하고, 편법 승계와 연관 있을 만한 내용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전 교수는 또한 공정위가 직권으로 탈법적인 행위 여부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CVC 규제완화 법안을 “재난자본주의 법안”이라 명명했다. 근본적으로 총수일가의 세습과 사익편취에 악용될 수 있고 현행 지주회사 규제를 무력화하는 법안이라는 의미다. 박 위원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에서 우리나라 벤처 투자가 초기에 집중되고 후기 단계에선 약하다, 이른바 ‘엑시트’(exit·성장한 벤처기업이 M&A 등으로 자금회수)가 안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게 CVC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다”라며 “미국에서 계열사 편입을 통한 투자금 회수 비중이 높고 CVC가 활성화되는 중요한 원인은 기술탈취에 대한 징벌배상 때문”이라 주장했다.

박 위원장은 “기술탈취 유혹이 생기더라도 미국에서는 징벌배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기업이 ‘프리미엄’을 주고 벤처기업을 사버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징벌배상제를 도입하고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협력을 안 하려는 현상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CVC 규제완화를 할 게 아니라 징벌적 배상이나 디스커버리 제도(특허 침해 기업의 증거자료 요구권) 도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벤처캐피털(CVC) 규제완화는 혁신인가? 재벌특혜인가?’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박용진 의원 페이스북
▲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벤처캐피털(CVC) 규제완화는 혁신인가? 재벌특혜인가?’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박용진 의원 페이스북

CVC 도입이 한국의 벤처 생태계를 성장시키기 위한 보완책이라는 여론·보도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권희원 전국금융산업노조 금융정책본부 위원장은 “삼성처럼 지주회사가 아닌 대기업집단, 금융지주회사 중 일부도 CVC를 이미 설립해서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있고, 일반 지주회사도 지분투자를 통해 이미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정부도 금융위원회를 통해 올 해 말까지 조성되는 8조원 규모의 성장지원펀드를 2022년까지 15조원 규모의 스케일 업 펀드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며 “다양한 지원 방안이 마련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CVC가 도입되지 않아서 벤처생태계 자금이 부족하다는 식의 접근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재계에서는 “CVC 허용이 형평성·역차별을 시정하는 것”이란 반론을 제기했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실장은 “CVC 허용이 재벌 문제처럼 인식돼 있는데 2019년 9월 현재 일반 지주회사가 163개, 자산 5조 이상은 37개 정도 된다. 나머지 88%는 중견기업들이기 때문에 재벌 문제로 특화된 게 아니라 일반적인 지주회사들의 대체적인 문제”라고 밝혔다. 또한 “외부자금 없이 100% 자회사로만 해야 한다면서 여러 부작용을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순수지주회사는 돈이 거의 없다. 사업을 안 하기 때문에 CVC에 투자해서 본격적으로 벤처에서 활성화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 외부자금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고객들로부터 하는 게 아니고 주주들을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의 경우 “재벌특혜 문제 관련해 투명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총수일가를 배제하거나 총수일가 지분 기업 투자를 배제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 외부자금을 끌어들인다고 해서 불특정다수 끌어들이는 건 아니고 벤처투자는 위험투자영역이기 때문에 활성화가 안 되고 있다. 펀드 결성이 안 되니까 투자가 안 된다”며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일감몰아주기 같은 건 철저히 막으면서 투자 영역은 재벌들에게 열어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 11일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김병욱, 이원욱 의원이 공동주최한 '기업주도 벤처 캐피탈 CVC 활성화 토론회'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김병욱 의원 페이스북
▲ 11일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김병욱, 이원욱 의원이 공동주최한 '기업주도 벤처 캐피탈 CVC 활성화 토론회'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김병욱 의원 페이스북

공정거래위원회는 CVC 규제완화 방침이 밝혀진 이래 꾸준히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승규 공정거래위원회 지주회사과장은 토론회에서 “지주회사는 원래 기업지배책임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 도입됐는데 CVC를 통해 다른 기업을 지배하게 되면 지주회사 장점이 희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 특혜 우려와 관련해서는 “CVC 투자 진짜 전략적인지, 총수일가 지원인지, 기술 상용화·개선 목적인지, 일감몰아주기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사전적 규제로 총수일가의 CVC 지분 보유를 금지시키거나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 투자를 금지시키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한 사항인 것 같다”며 “사전적 규제의 실효성을 어떻게 확보할지도 검토해야 할 거 같다. 다만 이 같은 제안이 벤처투자 활성화라는 CVC 도입 취지를 훼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중소기업벤처부 등과 논의 중이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 밝혔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앞서 CVC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참석해 끝까지 토론을 지켜봤다. 주최자가 아닌 의원이 자리를 지키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그간 적극적으로 규제완화를 촉구해온 김병욱 의원은 “오늘 2시간가량 토론회에 있었는데 머리가 복잡하다”며 입을 열었다. 그는 “한국경제는 국가 부담이 늘어나는 구조다. 결국 국민 세금으로 전개될 것이고 민간 유휴자금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법·제도적 틀을 만드는 게 국회 역할이라 생각한다”며 “경제력 집중에 대한 관점도 차이가 있다고 본다. 대통령부터 모든 장관이 투자를 이야기하는데 대기업 투자를 경제력 집중 가속화라고 하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박상인 위원장은 발언 기회를 얻어 “기업 투자로 경제력 집중이 우려돼 안 된다는 학자는 없다. 전경련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출자와 투자라는, ‘자’자만 같지 전혀 다른 두 가지를 묶은 재앙적 결과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에서 정말 고민되시면 저를 불러주시면 토론에 응할 의도가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용우 의원의 경우 “벤처투자가 잘 되려면 투자대상인 스타트업이나 벤처업계에 유망한 회사들이 많이 보여야 한다”며 벤처 투자가 단지 규제 여부로 좌우될 문제는 아니라고 꼬집었다. 이어 “금산분리 이슈가 재벌특혜 문제라고 보진 않는다”면서도 “금융회사는 신용·사업을 평가하고 투자하는 사람, 산업은 돈 받는 선수다. 그 두 개가 섞이면 과연 효율적일까. 금산분리는 사실 선수와 심판이 연결되면 안 된다는 자원배분 효율에 의한 기본적 ‘룰’이면서 불문율”이라 밝혔다. 또한 “구글벤처스가 자기자본 100%인 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바로 소송 당하고 사후적 조정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앞뒤가 바뀐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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