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증거 싸움’이면 고 이재학 PD는 구조적으로 불리했다. 자신의 업무 내용 자료와 근무기록이 다양할수록 유리하지만, 직원인 이 PD는 회사보다 자료가 많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해고로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기에 자료를 의도적으로 모은 상태도 아니었다. 

상황을 더 힘들게 한 건 청주방송 측 자료 은폐와 위증이었다. 이 PD는 집에 남겨둔 큐시트, 협조공문, 기안서 등을 뒤지고 동료들에게 은밀히 부탁해가며 자료를 모았다. 대부분이 국장·팀장에게 업무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였다. 청주방송 임직원들은 법정에서 이 PD 주장을 반박했다. 그 방식이 위증과 은폐였다. 지난 22일 발표된 진상조사보고서에 담긴 지적이다. 

▲이재학 PD가 연출을 맡은 2017년 'TV여행 아름다운 충북' 제작팀이 촬영하는 모습. 가장 왼쪽에 선 사람이 고 이재학 PD다. 사진=이재학 PD 지인 제공
▲이재학 PD가 연출을 맡은 2017년 'TV여행 아름다운 충북' 제작팀이 촬영하는 모습. 가장 왼쪽에 선 사람이 고 이재학 PD다. 사진=이재학 PD 지인 제공

 

전화 한 통 돌려 구할 수 있는 보고서, 법원엔 “없다”

이 PD가 가장 확인하고 싶어한 자료가 2017년 작성된 ‘노무 컨설팅 보고서’다. 이 PD가 “순수 프리랜서로 보기 어렵고 청주방송에 종속된 근로자로 판단될 여지가 매우 높다”는 분석이 담겼기 때문이다. 노무법인 유앤이 청주방송으로부터 ‘비정규직 실태 진단 및 인사규정 정비 컨설팅’을 의뢰받아 조사 후 작성했다. 간부 직원 모두가 프레젠테이션 형식의 최종 결과 보고서를 받아 봤다. 

이 PD는 내용을 보지 못하고 숨졌다. 그는 1심 소송 중 법원을 통해 문서제출 명령을 거듭 신청했다. 청주방송은 ‘관련 내용이 담긴 문서를 받았으나 보관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간부 직원 모두가 받고 남을 만큼 책자 수는 넉넉했고, 노무법인 유앤에 문의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였다. 청주방송이 소송 내내 노무법인에 문의하지 않은 사실은 뒤늦게 확인됐다.

▲2017년 노무법인 유앤이 조사 후 작성한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진단 및 인사규정 정비 컨설팅’ 결과 보고서. 이재학 PD는 1심 소송 동안 계속 청주방송이 이 자료를 법정에 제출케해달라고 신청했다.
▲2017년 노무법인 유앤이 조사 후 작성한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진단 및 인사규정 정비 컨설팅’ 결과 보고서. 이재학 PD는 1심 소송 동안 계속 청주방송이 이 자료를 법정에 제출케해달라고 신청했다.
▲위 보고서에 적힌 내용 중 일부. 이재학 PD가 노동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높다는 내용이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위 보고서에 적힌 내용 중 일부. 이재학 PD가 노동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높다는 내용이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청주방송이 보유한 업무 기록도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이 PD는 청주방송에 자신이 참여한 프로그램 구성안, 기안문 일체, 편성제작국장에게 보고한 주간업무 보고서, 정규직 PD 근태기록 등을 제출 명령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청주방송은 이 중 극히 일부 문서만 제출했고, 이 PD 신청과 무관한 문서를 냈다. 주간업무 보고서 경우 청주방송은 “이 PD는 보고하지 않았다”는 담당 국장 답만 전했다. 

진상조사위는 이들 자료에 “현장조사를 통해 손쉽게 필요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와 180도 다른 회사 증언에 충격 “손 떨린다”

이 PD는 소송 내내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자주 말했다. 회사가 법원에 밝힌 입장을 읽고는 ‘너무 황당하고 속이 상해 손이 떨릴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하아무개 당시 편성제작국장이 증인신문을 받던 법정에선 이 PD는 “어떻게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저런 거짓말을 하냐”고 분통도 터뜨렸다. 그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유서에 썼다.

▲하아무개 당시 편성제작국장 증인신문 기록.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사진=고 이재학 PD 제공
▲하아무개 당시 편성제작국장 증인신문 기록.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사진=고 이재학 PD 제공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제천시문화예술위원회가 2018년 1월 이재학 PD가 연출한 '박달가요제' 이자 반납 관련해 보낸 이메일. 실무자는 '이재학 PD'라고 적었다. 사진=고 이재학 PD 제공
▲제천시문화예술위원회가 2018년 1월 이재학 PD가 연출한 '박달가요제' 이자 반납 관련해 보낸 이메일. 실무자는 '이재학 PD'라고 적었다. 사진=고 이재학 PD 제공

 

하 편성국장 증언은 회사 입장과 같았다. 먼저 그는 자신이 CP로 있었던 2017년 ‘아름다운 충북’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에 대해 ‘이재학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자신을 포함해 회사에서 ‘이재학씨’라고 부르지 ‘이재학 PD’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PD가 ‘연출’이나 ‘PD’라고 적힌 자료를 찾기는 쉽다. 이 PD와 함께 프로그램을 제작한 작가·조연출·운전기사·카메라 기자 등은 그가 시종일관 ‘이재학 PD’라 불렸다고 밝혔다. 한 퇴사자는 “이재학 PD가 스스로 말하기 전까진 당연히 정직원인 줄 알았다”고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밝혔다.

하 국장은 ‘아름다운 충북’ 관련해서도 이 PD가 아닌 자신이 연출자라고 말했다. 이 PD가 주장하는 구체적인 지시-보고 관계도 부정했고, 이 PD가 주도했다고 말하는 지자체와의 보조금 사업 협업도 본인이 주도했다고 밝혔다. 또 촬영에 정직원은 참여한 적이 없고, 이 PD는 자기 장비를 썼지 청주방송 장비를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청주방송 편집기를 쓰려고 ‘장비사용계약서’를 썼다고도 덧붙였다. 

이 PD가 거짓말이라며 분노한 증언들이다. 그는 하 국장을 포함한 모든 CP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지시받았고, 관련 문서도 남아있다. 지자체와 일일이 협조공문을 주고받으며 기안문을 작성한 것도 이 PD다. 아름다운 충북엔 정규직 촬영 기자가 자주 동참했다. 이 PD는 대부분 청주방송 장비, 편집실을 썼다. ‘장비사용계약서’는 쓴 적이 없다.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2018년 12월12일 청주방송이 청주지법에 낸 준비서면 중 일부 갈무리.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출처=진상조사보고서
▲2018년 12월12일 청주방송이 청주지법에 낸 준비서면 중 일부 갈무리. 밑줄 친 부분이 이 PD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출처=진상조사보고서

 

청주방송은 “이재학은 자발적으로 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PD가 기억하는 해고 상황과 정반대다. 청주방송은 “인건비 증액을 요구하는 이 PD에게 예비비를 전용해서 일부 올려준다고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 이 PD가 일방적으로 쉬겠다고 밝히고 제작에 참여하지 않아 회사는 대체인력을 간신히 구했다”고 법원에 밝혔다. 

이 PD는 “일방 하차됐다”고 일관되게 밝혔다. 그는 “함께 일하는 프리랜서 스태프들 인건비가 너무 적어서 이를 올려주고 스태프도 증원해달라고 편성제작국장에 요구했다. 편성국장이 흥분해 ‘그만두겠다는 것이냐’며 몰아붙였고 아름다운 충북에서 손 떼라고 했다. 며칠 후 ‘쇼 뮤직파워’도 손 떼라고 통보했다”고 설명했다. 일방적으로 쉬겠다고 밝힌 적도 없었다. 회사는 이 PD에게 하차 통보한 날 “다른 외주제작사를 알아보라”고 담당 CP에게 지시했다.

청주방송 1년 반 동안 “이재학, 자발적 퇴사했다”

청주방송은 나아가 이 PD가 ‘독자로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해 청주방송에 납품하는 외주업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진상 조사 결과 이 PD의 업무 방식과 외주제작사 방식은 전혀 달랐다. 

청주방송은 외주제작사와 용역 계약서를 썼으나 이 PD와는 작성하지 않았다. 외주제작사엔 ‘턴키 방식’으로 제작비 일체를 줬으나 이 PD는 회당 인건비를 받았다. 외주제작사는 자기 소유 장비를 썼고 이 PD는 청주방송 장비를 사용했다. 스태프 인건비도 외주제작사는 자체 산정했으나 이 PD 제작팀은 청주방송이 정했다.

▲PD ㄱ씨가 회사에 제출한 사실확인서. ㄱ씨는 이 PD가 해고될 때 현장에 없었지만, 관련 사실확인서를 썼다.
▲PD ㄱ씨가 회사에 제출한 사실확인서. ㄱ씨는 이 PD가 해고될 때 현장에 없었지만, 관련 사실확인서를 썼다.
▲PD ㄴ씨가 회사에 제출한 사실확인서. 이재학 PD가 프리랜서로서 자율적으로 일했다고 증언했다.
▲PD ㄴ씨가 회사에 제출한 사실확인서. 이재학 PD가 프리랜서로서 자율적으로 일했다고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정규직 팀장들도 협조했다. 영상제작팀장 ㄱ씨는 이 PD 해고 상황을 두고 ‘자발적 퇴사’라는 회사 설명이 맞다고 사실 확인서를 써줬다. 그러나 ㄱ씨는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다. 

기획제작국 팀장 ㄴ씨와 편성팀장인 PD ㄷ씨는 이 PD가 프리랜서로서 자율적으로 일했다는 사실 확인서를 썼다. 이와 관련해 ㄴ씨는 진상 조사에서 “법원이 이 PD를 노동자로 판단할 거라 예상했지만 어쨌든 프리랜서라고 생각해 확인서에 그리 썼다”고 밝혔다. 사실 확인서는 윤아무개 경영기획국장이 부하 직원을 시켜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진상조사위는 “이 PD는 회사의 허위 주장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고, 오랜 기간 근무한 청주방송이 자신의 연출 업무나 PD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습에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며 “이는 고인 사망에 기여한 요인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이재학PD 보고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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