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아나운서라는 이유로 노동법상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은 방송사와 이를 방관한 노동청에 제동을 거는 판결이 나왔다. 

대전지역 민영방송인 TJB대전방송에서 일하던 아나운서 김도희씨는 대전방송과 ‘전속 아나운서 출연계약서’ 등을 쓰고 2012년부터 6년간 일하다 퇴사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 아나운서가 2년 넘는 소송 끝에 퇴직금 일부를 받았다. 대전방송은 김씨에게도 프리랜서, 즉 노동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된 개인사업자라며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김씨는 사용자인 대전방송의 지휘감독 하에서 일했다며 노동법상 노동자임을 주장했지만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201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를 지적했지만 노동청은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같은해 말 퇴직금 등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 지난 2018년 10월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왼쪽)과 전직 TJB 아나운서 김도희씨가 열악한 방송계 노동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국회방송 갈무리
▲ 지난 2018년 10월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상돈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왼쪽)과 전직 TJB 아나운서 김도희씨가 열악한 방송계 노동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국회방송 갈무리

 

대전지방법원(판사 차호성)은 지난 18일 “김씨(원고)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근로자)에 해당하므로 대전방송(피고)는 김씨에게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계약의 형식(프리랜서 계약)이 아닌 실질 내용(사용자에 종속돼 지휘·감독을 받는지)을 고려해 김씨가 종속적 위치에서 실제 방송사의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봤다. 김씨가 처음 문제제기 때부터 주장해왔던 내용이다. 

재판부는 대전방송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신입 아나운서 교육을 진행하고 상황을 보고한 후 퇴근하도록 지시한 것, 김씨를 비롯해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사 견학생 안내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 그러던 중 다른 아나운서가 퇴사한 뒤 퇴직금 지급 소송을 제기하자 견학안내 업무에서 배제한 것, 프리랜서라면서도 휴가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 대전방송 소속이 아닌 다른 아나운서를 고용해 대행하도록 하지 못한 것 등의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재판부는 “출연계약서에는 프로그램 출연·진행을 규정하고 있는데 대전방송은 김씨에게 그 외 업무인 신입 아나운서 교육, 방송사 견학생 안내 업무 등을 지시했다”며 “김씨는 대전방송에서 어떠한 징계처분을 받은 적 없지만 출연계약서에 따라 김씨가 업무수행을 거부할 경우나 기여도가 낮을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규정해 업무수행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봐 “방송업무 뿐 아니라 방송 외적 업무에서도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다”고 해석했다. 

대전방송 출연계약서를 보면 김씨에게 대전·충남 이외의 지역 방송출연을 금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씨 등 아나운서들의 업무량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다른 지역 방송에 출연하는 게 어려웠다고 보고 김씨가 대전방송에게 전속돼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이 연차에 따라 일정액이 증가하는 전속계약금을 받은 것을 근거로 김씨가 받은 보수는 노동에 대한 대가(대상적 성격)라고 봤다. 

또한 재판부는 “대전방송은 김씨와 같은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사 취업규칙 등을 적용하지 않았지만 보수규정·인사규정·취업규칙 등의 적용을 받지 않았던 것은 방송사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임의로 정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방송사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아나운서들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았던 부분을 오히려 아나운서들이 노동자가 아니란 논리로 활용한 노동청 판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해석이다. 

이에 법원은 김씨가 청구한 퇴직금(근로기간 1년에 대해 30일분의 평균임금)을 모두 지급하도록 했다. 다만 미지급 임금 중 병가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며 원고(김씨) 일부승소로 결론이 났다. 

▲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TJB 대전방송 사옥.
▲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TJB 대전방송 사옥.

 

재판부는 퇴직금 등의 지연이자를 6%로 계산했다. 임금체불 지연이자 제도는 임금채권에 대해 노사간 별도 약정이 없을 때만 6%로 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해 확정판결을 받으면 연 20%의 이자를 부과하는 제도다. 노동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지연이자를 6%로 계산한 점, 노사가 금액을 두고 다투지 않은 병가 부분을 원고(김씨) 패소판결을 내린 점 등은 김씨 입장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미디어오늘은 대전방송 측에 판결에 대한 입장, 항소여부 등을 물었지만 22일 현재 답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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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전 아나운서 “비정규직 괴롭히는 방송사 관행 바로잡혀야”

이번 판결에 대해 김씨는 “노동법 위반의 고의를 가지고 비정규직 방송구성원들을 괴롭히는 방송사의 못된 관행이 바로잡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3차 전형에 걸쳐 입사했고 수습, 오디션 등을 거쳐 메인앵커를 맡았지만 구두통보로 해고될 위험 속에서 저임금으로 일했다. 김씨는 2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노동청에서 제대로 조사했으면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2년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노동청이 회사 내부사정을 조사하면서 김씨의 입장을 듣지 않은 사실을 소송 과정에서 확인했다. 김씨와 같은 비정규직 아나운서와 그렇지 않은 아나운서 간 차이가 어땠는지 조사한 내용이다. 

▲ 김도희씨가 노동청에서 받은 진정사건처리 결과내용.
▲ 김도희씨가 노동청에서 받은 진정사건처리 결과내용. 어떠한 근거로 사측의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김씨는 “해당 문건을 나한테 확인하지 않아 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며 “노동청에서 노동자성을 부정할 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고 그냥 ‘내사종결’이라고만 알려주니 (조사가 제대로 됐는지조차) 모르고 당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이번 판결이 널리 공유되길 바랐다. 그는 “소액사건임에도 18쪽에 달해 노동자임을 명백히 밝히는 판결문이 나온 건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슷한 고통으로 힘겨워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널리 공유되길 바란다”고 했다. 

노동부 차원에서 구제되도록 제도개선도 촉구했다. 그는 “근로감독관의 악의적이고 자의적인 판정을 막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더 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대전방송을 향해서는 “이제라도 법원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고 나와 내 동료들에게 휘두른 횡포와 갑질을 인정해 지상파 방송사에 걸맞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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