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돌아본 한겨레 10000호_안기부 수색에 백지발행도
돌아본 한겨레 10000호_안기부 수색에 백지발행도
1987년 언론 암흑기 ‘여명’에서 2017년 박근혜-최순실게이트 ‘불씨’까지

한겨레는 지난 5월18일 10000호를 냈다. 1988년 5월 한겨레 창간은 독재와 유착한 한국 언론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디어오늘은 이들이 걸어온 역사를 되짚었다. 외압과 권력에 당당히 맞선영광의 순간과 시대의 부침에 생존을 고민하는 위기의 순간이 날줄과 씨줄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편집자주

▲지난 5월18일자 한겨레 1만호 특별판. 독자 주주들이 보낸 글로 1만호와 1만 1호 특별판 지면을 꾸몄다.
▲지난 5월18일자 한겨레 1만호 특별판. 독자 주주들이 보낸 글로 1만호와 1만 1호 특별판 지면을 꾸몄다.

01. 1988년 5월15일 창간호를 냈다. 동아·조선일보 해직 언론인이 중심이 돼 ‘새 언론 창설연구위원회’를 세운 뒤 10개월 준비했다. ‘처음’이 많다. 국내 최초 국민주 모금, 컴퓨터 조판시스템 도입, 자체 윤리강령 마련 등이다. 언론감시 취재부서 여론매체부를 둔 점도 마찬가지. 한겨레란 순 한글 이름은 사무국 투표로 뽑혔다. 제호 배경엔 백두산 천지 목판화를 담았다.

02. 초대 대표이사 겸 발행인 송건호. 송건호 사장은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150여명 강제해직 사태에 책임지고 직을 사퇴한 뒤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했다. 19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고문을 당해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다. 그가 발행한 월간 ‘말’은 보도지침을 폭로해 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됐다. 2001년 12월21일 별세.

▲1988년 5월15일자 한겨레 창간호.
▲1988년 5월15일자 한겨레 창간호.

03. 1988년 7월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산재 피해자 첫 보도. 노동자들은 십수 년 일하며 신경 독성물질인 이황화탄소에 중독됐고 중증마비에 걸리자 강제 퇴직됐다. 중견기업이던 원진레이온은 1993년 폐업했지만, 산재 보상금을 받기 위한 싸움은 이어졌다. 그해 비영리법인 원진재단이 출범해 녹색병원을 세웠다.

04. 1988년 9월 송건호 사장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썼다. 청와대가 한겨레 기자에게 출입증을 발급하지 않고 사장 편지에 답이 없자 신문에 비공개 서한 전문을 공개했다. “한겨레가 요구하는 것은 기자실이나 특별한 편의시설 제공이 아니라 뉴스에 대한 접근권 자체라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왔습니다.”

05. 1988년 12월 노조가 결성됐다. ‘사원이 주인’이란 독특한 지배구조 탓에 노조 필요성에 논쟁이 벌어졌다. 경영‧편집권을 감시하고 외부 압력을 막으려면 노조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초대 위원장은 고희범.

06. 1989년 4월 공안합동수사본부가 리영희 한겨레 논설고문을 연행,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안기부는 김일성 주석 인터뷰 추진 등 방북 취재 기획을 문제 삼았다. 취재 요청 편지의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 용어를 트집 잡았다. 송건호 사장은 이 사건을 경향신문 강제매각,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함께 “해방 이후 언론계 3대 사건”으로 꼽았다.

▲1989년 7월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사진=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7월12일, 안기부 수사요원과 백골단, 경찰 등이 한겨레신문사 양평동 사옥의 철문을 부수고 편집국에 진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07. 1989년 7월12일 새벽 안기부와 경찰이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편집국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한겨레가 서경원 평민당 의원 방북 사건을 보도했는데 기자가 서 의원 방북을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다. 안기부 수사요원 70여명과 전투경찰 450명, 백골단 300여명이 저항하는 기자들을 뚫고 쇠망치와 전기톱 등을 동원해 수색했다.

08. 1991년 가을 ‘기자단 촌지 사건’ 폭로 기사. 보건사회부 출입기자들이 해외취재를 빙자해 여행을 다녀왔다. 대우재단과 아산재단, 제약‧제과‧화장품 회사로부터 받은 촌지를 나눠 갖는 과정에서 논쟁이 일었다. 당시 성한용 보사부 담당 기자가 회의 자리에 참석했다가 모든 내용을 적었다. 보도 뒤 해당 기자들이 사표를 내고, 언론사의 사과 성명이 이어졌다. 당시 각 기자가 받은 465만원은 한겨레 기자 월급 1년치보다 많았다.

09. 1994년은 창간연도에 이은 두 번째 변곡점이다. 한겨레21이 그해 3월 창간했다. 독자 공모로 새 주간지 제호를 정했다. 창간호 표지 이야기는 당시 모두가 쉬쉬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다뤘다. 2020년 6월8일 현재 1315호.

10. 1994년 5월 김현철씨가 한겨레 상대로 20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당시 명예훼손 사상 최대 청구액. 그는 무자격 한약업사들이 김현철에게 1억 2000만원의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4월27일 한겨레 1면을 문제 삼았다. 한겨레 특종은 아니었던 게 ‘함정’. 세계일보 의혹 보도에 한약업사 정재중이 정치자금을 김현철 쪽에 건넸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여명이 취재해 한겨레만 보도. 김현철씨는 3년 뒤 소 취하했다.

▲보건사회부 기자단이 촌지를 받은 사실을 폭로한 1991년 10월 11일자 한겨레 사회면.
▲보건사회부 기자단이 촌지를 받은 사실을 폭로한 1991년 10월 11일자 한겨레 사회면.
▲1997년 5월 열린 김현철씨 청문회에서 민주당 이규정 의원이 김현철씨 금전수수를 보도한 한겨레21 8호(94년 5월12일자)를 들이대며  ‘3년 전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궁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5월 열린 김현철씨 청문회에서 민주당 이규정 의원이 김현철씨 금전수수를 보도한 한겨레21 8호(94년 5월12일자)를 들이대며 ‘3년 전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궁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1. 1999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 학살을 처음 알렸다. 한국은 1965~1973년 30만여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한국군은 베트남인 4만 1450여명을 죽였고, 참전 한국군 4960명이 죽었다. 베트남 정부의 전범조사위원회가 작성한 기록과 현지 증언,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 김기태씨 고백 등을 보도했다. 2000년 6월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 회원 2200여명이 한겨레 사옥 앞에서 항의 시위하다 주변 시설을 부수고 수십 명이 사옥에 난입.

12. 2001년 3월부터 두 달간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 보도. 언론사 세무조사가 사회 논란이던 때다. 조선․동아일보 반대에 밀려 세종로 도로가 좁아지고, 지하철 노선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뀌는 등 언론 권력을 내세운 이권 추구와 사주일가 비리를 보도했다. 친일과 군사정권 미화 역사도 다뤘다. 25차례에 걸쳐 기사 70건을 썼다.

13. 2002년 12월 제1회 송건호언론상 시상. 전년 별세한 송건호 초대 사장을 기리기 위함이다. 수상자는 정경희 원로 언론인. 이후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강준만 교수, 1961년 군사정권에 처형된 고 조용수 민족일보사 사장 등이 수상자. 최근 18회 수상자는 임은정 검사.

▲2000년 6월2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 회원들이 사옥 안에서 끌어낸 사무용지 등을 불태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2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 회원들이 사옥 안에서 끌어낸 사무용지 등을 불태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1년 4월5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 시리즈.
▲2001년 4월6일자 한겨레 1면에 실린 ‘심층해부 언론권력’ 기획 시리즈.

14. 2005년 6월 ‘제2창간’을 공식 선언했다. 경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신뢰를 상품화하자’는 구상의 일환. 골자는 ‘200억 발전기금 모금 운동’과 ‘한겨레 보기 운동’이다. 정태기 당시 사장과 박원순 변호사, 영화감독 박찬욱, 배우 안성기, 작가 황석영 등이 공동본부장을 맡았다. 발전기금 21억원과 새 독자 1만 4000여명이 모였다.

15. 2006년 1월 국내 언론사 가운데 처음으로 시민편집인 제도를 도입. 시민을 대표해 신문 제작에 관여한다. 기사에 의한 권리침해 행위를 조사하거나 사실이 아닌 기사에 시정 권고하고, 기사 방향에 의견을 낸다. 초대 시민편집인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현재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16. 2007년 1월 자사 기자 취재·보도 활동 준칙을 처음 제정하고 선포. △한겨레 기자의 책무 △공정한 보도 △정직한 보도 △취재 보도의 기본자세 △이해 상충 배제 등 모두 7개 장 50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17. 2007년 5월 “삼성 편법 대물림 구조조정본부 주도” 기사.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 항소심 직전 삼성그룹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제기. 5개월 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보도로 삼성 광고 중단 사태에 직면했다. 삼성 광고 중단은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 반복됐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을 보도한 한겨레21 표지(왼쪽)와 2017년 최순실 게이트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뇌물죄에 대해 다룬 한겨레21 표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을 보도한 한겨레21 표지(왼쪽)와 2017년 최순실 게이트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뇌물죄에 대해 다룬 한겨레21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18. 2007년 8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BBK 실소유주는 이명박’이라는 보도를 문제 삼았다. 5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당시 이명박의 도곡동 땅, 다스 실소유, BBK 실소유 등 각종 비리 의혹을 파헤치던 차였다. 같은 해 겨울 이명박은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 2009년 경영이 극도로 악화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겨울을 불렀다. 전체 인원 절반이 넘는 280여명이 유급휴직에 동참. 임원들은 6개월간 임금 일부 반납. 아이러니하게도 해갈해준 건 삼성 광고. 한겨레가 김용철 변호사 책 출판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안팎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20. 2010년 6월 편집국장 명의로 사과문을 냈다. 앞서 보도된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는 제목의 좌담 기사가 독자의 거센 항의를 받은 것. 한겨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이 기사와 제목에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됐다”며 사과. 진보진영 지지자들과 진보언론 갈등이 표면화한 사례였다.

21. 2010년 12월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사상의 은사’ 리영희는 1988년 한겨레 창간 당시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다. 한겨레는 사설에 “지금도 여전한 자본과 권력의 숨겨진 진실을 한겨레는 얼마나 드러냈는가. 생존을 핑계로 타협한 일은 없는가. 선생은 과연 평안히 눈을 감으셨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삼가 옷깃을 여민다”고 썼다.

▲2010년 6월 한겨레는 앞서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는 제목의 좌담 기사에 대해 편집국장 명의로 사과문을 냈다.
▲2010년 6월 한겨레는 앞서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는 제목의 좌담 기사에 대해 편집국장 명의로 사과문을 냈다.

22. 2012년 1월 한겨레 토요판이 첫 발행. 이슈 하나를 긴 호흡으로 다룬다. 2014년 8월부터 연재된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은 소설을 읽는 듯한 긴박감 선사. 토요일자 신문 정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한겨레 토요판은 신문사들 주말 얼굴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23. 2012년 정수장학회와 MBC의 비밀회동을 고발했다.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을 매각한 대금으로 선거에 활용할 계획을 폭로. 이를 보도한 최성진 기자는 자택을 압수수색 당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법원은 최 기자에게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망가진 MBC의 선거 획책이 드러났다.

24. 2013년 1월 국정원의 2012년 대선 개입 사건을 제대로 보도했다. “국정원 여직원, 대선 글 안 썼다더니 야당 후보 비판 등 91개 글 올렸다.” 국정원은 정환봉 기자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 겁주기용 고소였다. 국정원 댓글 공작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에 따른 조직적 범죄였음을 폭로했다. 2013년 각종 언론상을 차지했다.

25. 2014년 2월 인터넷뉴스 사이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창간. 프랑스 ‘르몽드’, 일본 ‘아사히신문’, 스페인 ‘엘파이스’ 등 각국 주요 언론사와 손잡고 현지어로 안팎 소식을 전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뉴스 서비스 대열에 합류했다.

▲2015년 10월19일 1면에 교육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선전하는 의견광고가 실려 ‘광고가 지면의 연장인가’를 두고 사내 토론회가 열렸다. 한겨레는 2011년 12월1일엔 종합편성채널 4곳 개국에 1면 광고란(백지 발행)을 이용해 반대 뜻을 밝혔던 터였다.
▲2015년 10월19일 1면에 교육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선전하는 의견광고(위)가 실려 ‘광고가 지면의 연장인가’를 두고 사내 토론회가 열렸다. 한겨레는 2011년 12월1일엔 종합편성채널 4곳 개국에 1면 광고란(아래)을 이용해 반대 뜻을 밝혔던 터였다.

26. 2015년 10월19일 1면에 교육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추진을 선전하는 의견광고가 실렸다. 광고는 회사 내 논란을 촉발했다. 노사는 사내 토론회를 열었다. ‘지면과 광고는 별개’라는 사측과 ‘광고도 지면의 연장으로 기준이 필요하다’는 노조 견해가 갈렸다. 2011년 12월1일에는 저항의 의미로 1면 광고란을 백지 발행. 이날 종합편성채널 4곳이 개국했다.

27. 2016년 3월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발간. 세월호 참사를 취재한 정은주 한겨레21 기자와 박다영·박현진씨, 박수빈 변호사가 10개월에 걸쳐 펴냈다. 백서는 한겨레21이 입수한 15만장 가까운 수사 및 재판기록, 국정조사특위 자료, 3테라바이트(TB) 넘는 음성·영상 자료 등 한겨레 취재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700쪽짜리 책은 20일 만에 3쇄를 찍었다. ‘시민이 기록한 세월호 백서’였다. 정은주 기자는 이 취재로 한국기자상과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28. 2016년 9월20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는 보도로 최순실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미르·K스포츠재단을 비롯한 국정농단 단독 보도는 한 달가량 이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열렸다.

▲한겨레는 2016년 9월20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가 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을 보도하며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한겨레는 2016년 9월20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가 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을 보도하며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 한겨레는 2017년 8월25일 대통령 배우자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꿨다. “표기 원칙 지키지 못한 과거 기사 사과드립니다”란 제목의 사과문도 냈다.
▲ 한겨레는 2017년 8월25일 대통령 배우자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꿨다. “표기 원칙 지키지 못한 과거 기사 사과드립니다”란 제목의 사과문도 냈다.

29. 2017년 8월 대통령 배우자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꿨다. “표기 원칙 지키지 못한 과거 기사 사과드립니다”란 사과문도 냈다. 문재인 대통령 배우자 김정숙 ‘씨’ 호칭 논란이 계기.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대통령 부인에게 ‘씨’ 호칭을 사용한다는 교열 원칙을 뒀지만 일부 지키지 못한 데 사과하면서도 호칭을 바꿨다.

30. 2019년 5월 젠더데스크 신설. 국내 언론사 가운데 처음. 젠더데스크는 편집국장 직속 기구다. 국내 성평등 문화를 확산하고 젠더 이슈를 발굴하는 역할이다. 기사를 성인지 감수성에 비춰 모니터하고 개선점을 구성원에게 알린다.

※ 참고 : 한겨레신문사 ‘진실의 창, 평화의 벗: 서른 살 한겨레의 기록’, 한겨레 온라인 아카이브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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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죄인 2020-06-07 14:42:30
한걸레신문 1호....창간호 20만원에 판매
상태 양호

바람 2020-06-07 13:58:54
그토록 권력을 감시하며 저항했던 이들이 어떻게 자본에 그리 쉽게 물들었을까. 어렴풋한데, 미국 시인 엘리엇은 그의 창의성이 노벨상 이후에 멈췄다고 말했다. 프랑스 작가 발자크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더 좋은 작품을 남겼다. 물론, 삶이 어려워야 뛰어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려웠다가 크게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 중에, 풍부한 상상력이 지워진 사람이 유독 많다는 말이다. 뭐가 문제일까. 목표달성? 탐욕?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생각이 180도 바뀐 사람은 탐욕문제가 가장 컸다. 한겨레의 현재 목표가 뭔가. 제1위 신문? 요즘 내가 한겨레를 잘 안 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