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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의 항의 시위와 한국 언론
2020년 미국의 항의 시위와 한국 언론
[ 김동원의 연구노트 ]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와 백악관의 대응이 심상치 않다. 사건이 발생한 미니애폴리스에서 촉발된 시위는 이제 약 30여개의 도시로 확산 중이다. 최근 보도된 미국 내 항의시위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흡사 코로나19 확산 지도로 착각할 정도다. 코로나19 감염병과 항의시위라는 두 사회 재난 상황이 중첩되고 있는 형국이다.

▲ 지난 6월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니온스퀘어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월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니온스퀘어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며칠 동안 미국의 항의시위를 보도하는 외신과 국내 언론을 보면서 데자뷰처럼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되었던 뉴올리언스의 악몽이다. 재난 초기 피해 상황의 중계에 집중하던 언론은 시간이 흐르며 약 6만 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대피한 슈퍼돔과 대피소를 찾지 못한 시민들이 산재한 시가지로 눈길을 돌렸다. 언론은 기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슈퍼돔에서 들려오는 온갖 풍문과 미확인 전언으로 강간과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재해를 피해간 시가지에서는 상점 약탈과 강도가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물론 시민들의 항의시위도 벌어졌다. 피해 지역 뿐 아니라 뉴올리언스의 이주민 계층에 대한 지원 차별과 혐오에 대한 항의가 그것이었다.

이 아비규환의 상황을 보도한 언론의 키워드들은 2020년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다. 폭동, 약탈, 폭력시위, 유혈시위 등의 단어가 기사의 헤드라인에 등장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 외신과 국내 언론의 보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언론이 재미 한국인의 상황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미 폭동 확산에 한국 상인도 피해”라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은 항의시위의 일면만을 보여주고 있다.

15년 전 뉴올리언스 사태와 2020년 인종차별 항의시위의 또 다른 유사점은 바로 정부 대응에 있다. 무엇보다 며칠 전 트위터에서 경고조치를 내린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은 시작된다”(When the looting starts, the shooting starts)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단지 경찰의 관행적인 과잉진압만의 문제가 아니다. 법과 제도에서는 평등이 명시되었어도 그것이 행정과 집행에서 어떤 차별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성찰과 해법의 요구가 더 중요했다. “Black Lives Matter”는 피케팅 문구일 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가리키는 명사이기도 하다. 뉴올리언스 사태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슈퍼돔과 시가지에서 약탈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넘쳐나자 주지사와 시장은 수색과 구조활동을 접고 약탈과의 전쟁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명을 구하는 대신 사유재산 보호에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전형적인 ‘엘리트 패닉’을 보여준다. 대규모 시위, 특히 지금처럼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시위는 불특정 다수의 여러 행동이 뒤엉켜 나타난다. 거리 행진, 거리 연설, 경찰서 등 관공서 앞 군중집회, 경찰과의 충돌 등 다양한 항의행동 중 무엇에 주목하고 부각시키는지는 바로 언론의 선택이다. 문제는 이렇게 일부 행동에 집중한 언론 보도가 대통령 뿐 아니라 정부 관료를 ‘시민들이 공황에 빠질 것’이라는 공황 상태로 몰아간다는 점이다. 항의시위의 행동이 아닌 그 동기와 요구에 대한 정보는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대통령의 발언이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설명과 분석은 시민에게 부족하고 왜곡된 정보와 상상을 제공하게 된다. 언론의 영향력은 현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도하는가보다 정부와 시민, 국회와 시민, 또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 간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미국의 항의시위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미국 언론의 시위보도에서 한국 언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발언과 행동을 부각함으로써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가르는 사회적 관계의 설정은 전혀 다른 사건에서 만연하고 있다. 바로 정의기억연대 관련 언론보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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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020-06-02 13:32:54
평화시위가 아니면 기득권/군/자본가에게 더 큰 명분만 줄 뿐이다. 돈으로 인간(스파이, 탐정, 사진작가, 전/현직 언론인)을 매수해 시위를 더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너무 쉽다.

바람 2020-06-02 13:25:30
그대들이 선택한 것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서는 노력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부를 명예라 여긴다. 언론은 노력한 자본가들이 소유한다. 인간은 모두 돈에 대한 탐욕을 갖고 있다. 인간이 돈에 대한 탐욕이 없었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에는 탐욕과 돈의 전체주의에 빠져있다가, 내가 위험해지면 바로 극단적인 피해자로 변하면 대중은 과연 시위자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자본가들은 스파이를 고용해 시위를 더 폭력적으로 만들고 언론인을 고용해 자극적인 장면만 내보내는 건, 자본을 진리라고 여기는 자본 이기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거 아닐까. 대자본의 싸움에서 트럼프가 진다면 이 시위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대자본이 트럼프를 신뢰한다면 이 시위는 성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