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립묘지(국립현충원) 파묘 또는 안장 불가 논란 중심에 백선엽 전 장군까지 올랐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친일파를 국립현충원에서 파묘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자 재향군인회 등 군의 계보를 잇는 일부 단체가 반대하고 나섰다. 심지어 이들은 친일 행위는 불가피했다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최근 건강이 쇠약해진 백선엽 전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불가에 반대하고 있다.

백 전 장군은 과연 불가피한 친일을 했을까. 대한민국의 법정 위원회인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법에 따라 11년 전 백 전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일본군(만주국군)으로 활동했다. 그는 27년 전(1993년) 스스로 펴낸 일본어판 자서전에서 그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국가가 그를 친일파로 판단했는데,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6·25 때 전공이 있다하나 우리 국권을 침탈한 제국주의 범죄에 부역하며 독립운동가를 토벌한 인사에까지 국립묘지를 내어주기는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재향군인회는 지난 28일 성명에서 백선엽 등을 들어 “일제의 강압적 체제 아래서 불가피하게 일본군에 입대해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반민족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이며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2009년 11월 펴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위원회는 백선엽에 대해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 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고 판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초 만주국군 보명 제28단(연대에 해당)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1942년에서 1943년 1월까지 자무스(佳木斯)의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로 전임됐다. 그로부터 1945년 봄까지 기동지구에 파견돼 항일세력 토벌 활동에 종사했다.

▲백선엽 전 장군이 지난해 6월10일 방문한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구 자유한국당) 대표와 만나 환담하고 있다. 사진=미래통합당
▲백선엽 전 장군이 지난해 6월10일 방문한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구 자유한국당) 대표와 만나 환담하고 있다. 사진=미래통합당

특히 간도특설대 활동이 두드러졌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는 간도특설대 행각과 관련, 위만군사(길림인민출판사, 1993년)에 실린 내용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이 부대는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있던 부대로 삼광정책(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는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고, 적극 소탕을 조직했다. 이 책은 특히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수단으로 우리 항일연군과 기타 애국 무장세력에 대해 피가 낭자한 진압을 했다”며 “토벌 중 항일애국인사와 무고한 백성을 대거 살해했으며 또 적극 정보를 알아내 고문을 자행하고 항일조직 와해 등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의하면 특설부대 설립부터 해산까지 토벌 활동과 사건은 모두 108차에 달했으며 살해된 항일 인사와 군중 등이 172명에 달했고, 강간·강탈·고문·구타·방화 등 죄악은 부지기수였다.

백선엽이 일본에 출판한 자서전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회고록(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錄)’을 보면, 백 전 장군은 간도특설대 구성에 대해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일계(日系) 군관(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독립세력을 게릴라라고 지칭)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라 바빴다”며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며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토,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소개했다.

백선엽의 다른 일본어판 자서전 ‘대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1993년’을 보면, 백 전 장군은 자신이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온 뒤 “토벌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됐다”고 썼다. 그는 “부대장과 중대장의 일부가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한국인이었다”며 “왜 만주국에서 한국인부대가 편성됐는가 하면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인 발상으로 처음부터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도 했다. 또한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에 근무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정예 그 자체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백 전 장군 스스로 독립군을 토벌했음을 자백하는 대목도 나온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중략)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중략)”

일본의 간계임을 알면서도 동포에 총을 겨눴고, 비판받아도 어쩔 수 없다며 토벌에 임했다는 고백. 그는 이에 대해 반성이나 사죄를 한 적은 없다.

김석범 등이 펴낸 ‘만주국군지’(1987년, 36~37쪽 인용)는 “1938년 (간도특설)부대 창설 후 1945년 8월 부대 해산 시까지 간도특설대에 입대한 사병 수는 2100명이었고, 동 부대에 근무한 한인 군관은 다음과 같다”며 제9기 백선엽을 기록해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의 백선엽 편에서 “1942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며 “그중에서도 1943년 2월부터 만주지역 항일무장 독립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간도특설대에서 이들에 대한 탄압 활동을 전개했고, 또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간도특설대원으로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으로 들어가 가동지역에서 중국군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종사했다”고 썼다. 위원회는 1945년에도 백선엽이 그해 봄부터 일제의 패전 당시까지 연길지역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고 기록했다. 위원회는 백선엽의 이런 행위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된다”며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백선엽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10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 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백선엽에 대해 거의 유사한 내용의 근거와 판단이 실려있다.

▲지난 2011년 백선엽 전 장군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이 실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당시 KBS 새노조) 노보에 실린 사진. 사진=KBS 새노조
▲지난 2011년 백선엽 전 장군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이 실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당시 KBS 새노조) 노보에 실린 사진. 사진=KBS 새노조

특별법에 의거에 친일 행각이 판명된 인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공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민족과 나라에 큰 해를 입힌 전력이 있는 인물의 경우 국립묘지 안장은 부적합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작업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29일 미디어오늘에 “국립묘지에는 논란의 인물, 공과가 교차된 인물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다음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실린 백선엽의 약력이다.

1920년 10월11일 출생

1934년 평양사범학교 심상과 입학 1939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0년 봉천군관학교(제9기생) 입학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 졸업

1941년 12월~1942년 만주 동부보청에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 해당)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

1942년~1943년 1월 자무스(佳木斯)의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

1943년 2월 만주 간도성 명월구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로 전임됨

1944년~1945년 간도특설대원으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 넘어 이른바 기동(冀東) 지구에 파견되어 토벌 활동에 종사함

1945년~1945년 8월 1945년 봄부터 연길 국경 경비 임무에 종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백선엽 편. 820쪽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백선엽 편. 8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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