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넷플릭스 다큐 ‘미디어 재판’ 단상
넷플릭스 다큐 ‘미디어 재판’ 단상
[김동원의 연구노트]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빼놓지 않고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여론 형성에 미치는 미디어의 영향이었다. 주로 매스 미디어 효과론이나 미디어와 사회 같은 강의에서 다룬 이 주제는 저널리즘의 규범, 즉 객관성이 왜 필요한지 설명할 때마다 등장했다. 미디어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미디어는 수용자 개인이 마주하지 않는 타인들을 어떻게 상상하게 만드는가’로 요약될 수 있었다.

20여 년 전의 강의가 떠 오른 이유는 최근 몰아본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디어 재판>(Trial by Media) 때문이었다. 제목만으로는 가장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할 재판에 어떻게 미디어가 개입하는지 보여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일곱 개의 에피스드에서 핵심 등장인물은 피의자와 미디어뿐이 아니었다. 피의자와 원고, 시민과 배심원, 변호사와 검사 등 거의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미디어 또한 그 일부가 된다. 

가족과 친구 간의 사적인 갈등을 선정적인 쇼로 만들어 살인까지 유발한 TV 프로그램, 뉴욕 지하철에서 십대 흑인 청소년 네 명에 자행된 살인 사건, 경찰 네 명이 아프리카 기니에서 유학 온 청년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건, 분식회계로 개인 자산을 불려온 스타 창업자의 범죄, 끔찍한 집단 강간 사건을 둘러싼 여론 분열, 매관매직 혐의를 받은 주지사가 승소한 사건 등 한국 시청자들이 일반적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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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재판>에서 보여주는 신문과 방송의 역할은 여론을 좌우하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아니었다. 도리어 배심원제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 사법체계의 특징을 노려 미디어를 그 수단으로 삼는 피의자와 변호사들의 권모술수가 이 시리즈의 핵심을 이룬다. 이들이 이용하는 미디어는 뉴스뿐이 아니다. 뉴스 인터뷰는 물론 유명 토크쇼와 예능 프로그램, 심지어 종교방송까지 피의자의 이미지를 반전시키는데 활용한다. 흑인 청년들에게 총을 난사한 백인은 무법천지인 뉴욕 지하철을 지키는 자경단으로 변신하고, 사기와 자금 세탁을 자행한 창업주는 신실한 종교인으로 탈바꿈한다. 집단강간 사건에서는 초유의 TV 재판 생중계를 통해 피해자의 실명과 주소가 공개되고, 파렴치한 정치인은 도널드 트럼프의 TV쇼까지 출연하며 대중이 자신을 농담거리로 소비하도록 만든다. 

이들이 노리는 핵심 시청자는 일반 시민도, 검찰도, 사법부도 아니다. 배심원 평결이 핵심인 미국 사법제도에서 이들은 피의자 이미지를 세탁하거나 원고의 부도덕성을 가공하는 수단으로 미디어를 이용한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피의자와 원고의 이미지는 다시 여론을 분열시키거나 반전시키고 이러한 분위기로 배심원단의 엉뚱한 평결을 이끌어 낸다. 부패와 횡령을 일삼은 피의자가 최후진술에서 배심원단을 향해 성조기를 몸에 휘감으며 과장된 애국자 퍼포먼스를 벌이는 장면은 미국 법정이 방송국 스튜디오가 아닌지 의심케 할 정도다. <미디어 재판>에서 최근 한국에서도 벌어진 기자와 검찰의 유착 같은 공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변호사나 피의자가 미디어 관계자와 모의하는 장면도 없다. 단지 미디어는 피의자, 변호사, 검찰, 원고와 시민의 반응을 발생한 대로 보여줄 뿐이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디어는 여론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가 아니라 “미디어는 여론 형성을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가”로 바뀐다. 미디어 재현의 편향성과 프레임이 아니라 뉴스의 속보성, 토크쇼의 가벼움, 종교방송의 진정성 등 콘텐츠의 일반적 특징과 시청자들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단으로 이용되는 셈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이렇게 이용당했다고 하여 저널리스트가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피의자와 변호사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이들의 행태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객관성이란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이성적 노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참을성, 집요함, 지략, 정직, 겸손,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타인에 대한 신뢰, 진통제 구실을 하는 상상과 자위적 환상에 대한 거부, 우리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라는 감정과 의지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재판>에서 나타난 미디어 행태는 피의자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이성적인 객관성의 규범이 왜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정작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은 미디어를 이용하는 범죄자와 변호사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거리를 두고 반성해야 할 기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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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020-05-24 16:54:43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단 하나 역사의 기록을 통해 살짝 유추해볼 뿐이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는 이익과 탐욕이 존재한다. 이 카오스 상황에서 빠른 대처는 역사의 의미를 캐치해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진실, 진심, 참여, 판례, 역사.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패배할 수도 있지만 깨어있는 시민 앞에서는 어떤 것도 쉽게 지나가지 못한다. 진실은 감추려(새로운 방법/기술) 해도 드러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