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명이 숨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산업재해 참사를 두고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화재 원인을 담뱃불로 추정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지난 12일 소방당국 보고문건을 토대로 한 보도인데, 조사 결과가 아닌 상황 보고용인 데다 당시로선 구문인 문건을 두고 담배를 원인으로 강조해 소방당국이 난처해하고 있다. 

YTN과 SBS는 지난 12일 소방청이 작성한 문건을 인용해 ‘단독’ 보도를 냈다. YTN은 “[단독]우레탄폼 희석·승강기 설치 동시 진행 확인...담배꽁초도 발견” 기사에서 “불이 시작된 지하 2층에서 우레탄폼 희석과 승강기 설치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현장에선 또 담배꽁초가 발견됐는데, 소방당국은 용접이나 담배 불티가 우레탄폼에 튀어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SBS도 같은 문건을 출처로 “유증기가 발생하는 우레탄폼 작업 현장에서 불꽃이 튀는 작업에 흡연 가능성까지 발견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우레탄폼 작업과 승강기 용접이 동시에 이뤄진 사실이 이미 알려졌던 데 비추면, 모두 담배꽁초와 담뱃갑 발견에 무게를 실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2일 SBS 8뉴스 보도 갈무리
▲12일 SBS 8뉴스 보도 갈무리
▲12일 YTN 보도 갈무리
▲12일 YTN 보도 갈무리

이후 참사의 원인이 담배일 가능성을 한층 확정적으로 보도하는 기사가 이어졌다. 문화일보는 “이천 창고 화재 현장서 담배꽁초·담뱃갑 발견”, 인사이트는 “38명 목숨을 앗아간 이천 물류창고 화재현장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됐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12일 인터넷매체 인사이트 헤드라인
▲12일 인터넷매체 인사이트 보도 헤드라인

정작 소방당국과 수사당국은 화재 원인으로 담배를 부각하는 보도 흐름에 당혹스러운 눈치다. 특히 문건을 작성한 소방청은 해당 문건이 8일 국회 보고용으로 작성돼, 그에 앞서 이뤄진 초반 조사 내용만을 반영할뿐더러 담배를 강조하려는 취지도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소방청 화재대응조사과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문건은 당시 4월30일부터 5월1일까지 열린 1‧2차 감식결과만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도 시점인 12일까지 진행됐던 3‧4차 합동감식 내용은 반영하지 않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자료라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지하 2층에서 폭발이 발생한 건 맞지만, 발화 가능 원인으로 A, B, C를 든 것을 언론이 하나만 강조해 확정적인 듯이 보도한 면이 있다”며 “진전된 조사를 종합하면, 만약 거기서 불이 났으면 담뱃갑이 다 타버렸다든지 하는 연소 흔적이 있을 텐데, 타지 않고 깨끗이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2일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참사 현장에서 과학수사요원들이 정밀 수색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2일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참사 현장에서 과학수사요원들이 정밀 수색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또 다른 소방청 관계자는 통화에서 “그 문건은 조사 결과 보고서가 아니다. 국회 보고회가 있어 각 의원실에 중간 상황 보고용으로 작성 제출한 것”이라며 “언론에 배포하지도 않았는데 화재 원인을 추정하는 내용으로 보도가 나와 놀랐다”고 말했다. 

수사당국도 보도 파장이 커지자 16일 참사 피해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3차 브리핑에서 “담배꽁초가 나왔다는 자료는 경찰에서 발표한 것이 아니고 수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행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경기남부경찰청 이천 화재참사 수사본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그 문건은 경찰에서 작성하거나 배포한 자료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뒤 “감정기관의 감정과 조사에 참여한 다른 기관들의 의견과 경찰 수사결과를 가지고 종합 판단하기 전엔 어떤 원인 때문에 화재가 났을 가능성이 높거나 낮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은 6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사진=민중의소리
▲민주노총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은 6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노동자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사진=민중의소리

노동계는 언론이 명확치 않은 정보를 가지고 개인 과실에 무게를 두고 보도함으로 인해 반복되는 건설 산업재해 참사의 구조 원인을 흐린다고 지적한다.

강한수 건설산업연맹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건설현장에서 화재가 나면 언론이나 건설사가 가장 처음 하는 이야기가 작업자의 과실이다. 이번에도 첫날부터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가짜뉴스가 나왔다”며 “원청으로부터 다단계 불법 하도급이 쭉 내려오면서 현장 안전 관리가 제대로 안 돼온 상황에서 여러 가능성 가운데 담배를 확대 보도하는 건 참사 원인을 ‘작업자의 문제’로 몰아가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익스프레스 참사 직후엔 중국인 노동자가 담배꽁초를 버려서 불이 났다는 근거 없는 악성 댓글이 달려, 참사로 숨진 중국인 노동자의 유족이 중단을 호소하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2016년 화기 작업 중 우레탄 단열재에 불이 붙어 발생한 김포 건설현장 화재 당시엔 재판에 넘겨진 사측 관계자들이 “노동자의 담배꽁초 때문”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경찰과 소방당국이 감식하고 제출한 증거와 자료를 종합 분석한 뒤 화재 원인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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