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소위 ‘프리랜서 PD’로 일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14년차 시사‧교양 프리랜서 PD인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지난 2월 ‘고 이재학PD CJB청주방송 대책위’ 출범 때 발언하다 말을 잇지 못한 이유다. 고 이재학 PD가 14년 간 휴일을 챙기지 못하고, 정규직이 퇴근한 뒤에야 편집기를 쓸 수 있어 늘 야근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다.

김 지부장은 CJB청주방송의 처우엔 “그런 식으로 일 시키는 경우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 청주방송은 대개 프리랜서 PD들이 회당 100만원에 맡는 프로그램 연출을 40만원 주고 지시했다. 업무량은 정규직의 2배였다. 김 지부장은 “지상파 여부를 막론하고 지역방송사들이 세간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PD가 이런 상황에서 일을 지속한 건 정규직 전환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주방송이 그 기대를 이용한 겁니다.”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 지부장은 지난 7일 미디어오늘과 만나 “독립PD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인 배경에 방송시장의 외주하청 구조, 방송사의 손쉬운 제작비 절감, 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 등 구조 요인이 켜켜이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투자 않고 외주사 의존, 가장 쉽게 깎는 게 “사람 값”

방송사들은 내부 정규직 PD에게 프로그램 제작을 맡기기보다 외주제작사에 의존한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지상파 3사가 내보낸 방송시간 중 외주제작 비중은 KBS2TV 56.4%, 서울MBC가 54.6%, SBS가 42.8%다. 한편 콘텐츠에 들이는 투자는 점점 줄인다. 김 지부장은 “요즘 방송사는 프리랜서 PD나 외주제작사가 제작비(협찬금)를 끼고 와야 계약한다”고 했다. 갑을관계 아래 비용분담은 완전히 기울어진다.

“예컨대 외주제작사가 한 고객으로부터 3억에 60분 다큐 2편을 의뢰 받았어요. 제작사가 기획안을 들고 가 방송사와 계약을 따요. 그럼 방송사가 3억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요. 자사 제작비는 투자하지 않았죠. 먼저 자사 몫으로 절반 넘는 1억 6000만~1억 7000만원을 떼 가요. 남는 액수에서 송출료, 즉 방송을 ‘쏘는’ 대가로 다시 5000만원 정도 떼요. 8000만~9000만원 정도가 남죠? 제작사가 영업이익을 떼가고 나면 남는 3000만원으로 2편 제작비를 모두 감당해요.”

직접 방송을 만드는 사람의 값이 가장 쉽게 깎인다. 김 지부장은 “각종 장비 등 고정비용을 빼고서 가장 후려치기 쉬운 게 프리랜서 PD 등 비정규직 스태프 인건비”라고 했다. 프리랜서 PD는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다수가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한다. 노동시간이나 급여, 고용안정을 규정한 법규는 없다.

이때 방송사 정규직 PD는 대부분 관리하거나 지시하는 역할에 그친다. “방송사 쪽에선 CP(국장급 책임프로듀서) 1명이 프로그램 5~6개를 컨트롤하고, 제작은 외주가 알아서 해요. 방송사가 실제 ‘하는’ 건 기획단계에서 지시, 시사와 송출 정도.” 김 지부장은 “심지어 자체 제작이 거의 없는 종편 채널의 경우 정규직 조연출을 외주 업체에 파견처럼 보내 일을 배우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재학 PD가 맡았던 한 청주방송 프로그램 엔딩 크레딧에 실린 이 PD 모습.
▲이재학 PD가 맡았던 한 청주방송 프로그램 엔딩 크레딧에 실린 이 PD 모습.
▲2017년 EBS의 열악한 제작환경과 갑질 문제를 고발한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EBS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고 김광일, 박환성 독립PD의 영결식 영정사진. 사진=금준경 기자.
▲2017년 EBS의 열악한 제작환경과 갑질 문제를 고발한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EBS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고 김광일, 박환성 독립PD의 영결식 영정사진. 사진=금준경 기자.

청주방송 착취,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정규직·언론 외면이 굴레 만들어

반면 고 이 PD가 청주방송에서 처했던 노동조건은 다른 프리랜서 PD들도 놀랄 정도였다. 그는 “이재학 PD 사건 이전엔 솔직히 PD 직능단체나 노동조합도 지역 방송사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PD 노동조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방송 시장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황에 지역 방송사는 중앙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진다. 지역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건은 좀처럼 화두에 오르지 않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이 PD가 청주방송에서 정규직화를 내다봤기에 13년간 몸담았다는 뜻이다. 청주방송처럼 프리랜서 PD에게 정규직이 할일을 지시하고, 회사 내 다양한 업무를 시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청주방송은 그를 해고하기 한 해 전 노무컨설팅을 의뢰해 “이 PD는 회사 종속 근로자로 볼 여지가 매우 높다”는 결과를 보고 받기도 했다.

김 지부장은 “그런 이 PD가 부당해고를 당하고, 여기까지 사건이 이어진 건 정규직 동료들의 외면 탓이 크다”고 했다. “자판기처럼, 기계처럼 일하는데, 동료라고 여기면 어떻게 지켜만 볼 수 있나요.” 그는 “2015년 MBN 정규직 PD의 프리랜서 PD 폭행 사건, 2017년 박환성‧김광일 프리랜서 PD의 사망사건 등 프리랜서 PD들의 산재사고나 갑질피해 사건이 일어날 때 정규직 PD들의 목소리는 간간이 나왔어도 모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언론보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충북 청주 CJB청주방송 사옥. 사진=손가영 기자
▲충북 청주 CJB청주방송 사옥. 사진=손가영 기자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서울 여의도 KBS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제공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서울 여의도 KBS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제공

방송비정규직, 법적 노동자로 자리 찾아야

방송비정규직 목소리를 모으는 게 중요한 건 그래서다. 김 지부장은 “그러나 방송비정규직, 특히 프리랜서 PD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했다. 프리랜서 PD들은 한 근무지에 모이지 않고 촬영도 편집도 따로 하는 데다, 처우와 급여도 천차만별이다 보니 공감대 형성도 어렵다. 변화를 이끄는 건 까마득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 ‘튀면’ 받게 될 눈앞의 손해는 가깝다. 

김 지부장은 그렇기에 더욱 방송계를 넘어 사회 전체가 이 PD의 사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 PD의 사건이 곧 모든 프리랜서 PD들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PD는 생전 당초 다른 프리랜서 PD들에게 노동자 인정 선례를 남기려는 생각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김 지부장은 “이 PD의 부당해고와 죽음을 둘러싼 과정이 사측의 사과로만 마무리돼선 안 된다”며 “이 PD의 처지에 놓인 프리랜서 방송 비정규직, 방송작가와 드라마스태프까지 적절한 대가와 권리를 보장받도록 새 기준을 쓰는 계기가 돼야 한다. 나아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가 법적 노동자로 자리를 되찾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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