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지난 5월7일은 한국 보수언론과 많은 기성언론들의 문제를 드러내는 세 가지 보도가 있었던 날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첫째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과에 대한 보도다. 알맹이 없고 정작 피해자는 배제된 이 기만적 쇼는 언론보도를 통해서 그럴듯한 의미있는 사과로 탈바꿈했고 심지어 노조 혐오로도 이어졌는데, 그것은 삼성홍보실의 승리였고 광고의 힘이었다.

둘째, 코로나 확진자가 다녀간 클럽과 성적지향을 연결시켜서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는 국민일보 등의 보도가 있었다. 중국인, 신천지 때와 마찬가지로 희생양을 삼기 위해서 방역과 아무 관련없는 감염 피해자의 소수자성을 매개로 삼아 이미 존재하던 혐오와 편견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아주 노골적이었다.

셋째, 윤미향 당선자에 대한 보도였고 이것이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보수언론 등은 늘 그랬듯이 검증되지 않았고 당사자의 반론도 없는 보도를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수 십 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전시 성노예 범죄에 맞서 피해자와 헌신적으로 연대해 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기금횡령범이자 거짓말쟁이로 둔갑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역사와 성과는 한순간에 누더기가 됐다. 그것도 피해자와 연대자의 오랜 인간적 관계를 파괴하고 이간질하는 가장 악랄한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곧 ‘그럴 줄 알았다’, ‘그 돈들은 조총련으로 갔을 것’, ‘파렴치한 위선자’, ‘기생충’, ‘간첩’, ‘빨갱이’ 등 온갖 막말 댓글들이 달렸다. 공격받는 당사자에게는 피눈물이 날 일일 것이다.

▲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인. 사진=이치열 기자
▲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인. 사진=이치열 기자

아마 다음 수순은 뭔가 수상쩍은 ‘시민단체’가 등장해서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자를 고발하고 그러면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사에 나서고, 그러면 사람들은 더욱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진실은 아주 나중에 이미 모든 게 무너지고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 밝혀질 것이고, 공격과 의혹을 쏟아내던 언론은 그것을 귀퉁이에 작게 싣거나 무시할 것이다.

왜 그런 식으로만 보냐고? 이런 식으로 당하는 사람을 한 두 번 본 게 아닌지 않은가. 바로 얼마 전에도 유시민 씨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려다가 들통난 사람들을 보지 않았는가. 그때 채널A 기자의 이야기는 ‘유시민이라는 사람은 적도 많아서, 거봐라 위선적인 인간이 많이 설쳤네 라며 온갖 욕을 먹을 거고 인생 종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개혁과 정의를 말하던 사람의 이중적 행태’가 아주 잘 먹히는 기사거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보수언론과 기성언론들을 보면 마치 먹이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같을 때가 많다. 누가 또 표적이 돼서 속보, 단독, 특종 경쟁 속에 실검에 오르고 영혼까지 탈탈 털리게 될지 걱정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일이 반복되고 이런 수법이 통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런 자극적인 기사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혹하게 해서 단기간에 클릭수를 높이고 그것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서 이 구조는 입장과 생각과 진영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정적 감정도 이용해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사고 과정과 판단에는 이성만이 아니라 무의식과 감정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와 입장, 생각, 진영이 다른 사람의 ‘숨겨진 약점과 흠결’이 드러나거나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면 방어하고 싶은 생각이 커지기가 어렵다.

당장 나부터도 비판적으로 보던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만약 이런 식의 공격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다면 선뜻 방어에 나서기보다 소극적이 되고 복잡한 심정이 들 것 같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설사 아무리 정의기억연대의 운동 방식과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 차이와 이견이 있었고, 유시민 씨에게 비판적이었고, 윤미향 씨의 출마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또 민주당이나 시민당이 아니라 진보정당들이 정치적 대안세력이 돼야 한다고 보더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자가 반일 감정을 조장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지난 30년 동안 피해자들을 이용하고 ‘앵벌이’ 시켜 왔다고? 정기적 회계감사와 국세청 신고까지 해왔는데도 돈이 어디로 빼돌려진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소송 지원과 국제 연대와 역사에 대한 조사와 기록 등에 많은 돈이 쓰여질 수밖에 없는지 알면서도 피해자 지원으로 돈이 다 가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거의 대부분 신뢰하거나 동의할 수 없다.

‘반미를 말하더니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유치한 비난에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처럼 보수적 기성언론들이 검증되지 않고 당사자의 반론도 반영하지 않은 일방의 주장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의 인생과 노력을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만드는 것을 지지할 수는 없다. 내가 그런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길 바란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물론 보수언론들은 처음과 달리 이튿날부터는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자의 반론도 마지못해 일부 반영하기 시작했다. 너무 모순이 분명하고 근거가 취약한 일방적 주장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반박 증거가 제시되기 시작한 재정문제보다는 원래부터 문제 삼아 온 정의기억연대의 운동 방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이용수 선생님의 이번 주장이 핵심 근거가 되고 있다. 친일적 보수언론들이 전시 성노예 피해자의 존재와 목소리를 이처럼 관심갖고 신뢰하며 대대적으로 실어주는 일은 참 낯선 일이다. 이들이 언제부터 피해자의 주장은 무조건 진실이고 검증도 필요없이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는 기계적 ‘피해자 중심주의’의 신봉자가 된 것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피해자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윤미향 당선자와는 좀 생각이 다르다. 피해자와 연대하고 존중하다는 것은 토론과 이견 제시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용수 선생님의 그동안의 용기와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하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지금의 말씀들에 대한 이견도 숨길 수 없다.

나는 피해당사자들의 증언이 담긴 책들은 ‘내용 검증이 제대로 안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료들이고, 30년 동안 1400번 넘게 지속된 수요집회는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일본정부의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는 강력한 무기였으며,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증오와 상처’만 남기는 일이 아니라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화해와 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아베 정부의 탓이며, 이미 수요집회와 피해자들에게 연대해 온 평범한 수많은 일본인들은 진정한 화해와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 줘 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이용수 선생님과 많은 선생님들의 그동안의 투쟁은 커다란 의미와 성과를 남겨 온 것이다.

▲ 지난 4월22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의기억연대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천436차 정기 수요시위를 코로나19 확산 방지 온라인 생중계로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지난 4월22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정의기억연대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제1천436차 정기 수요시위를 코로나19 확산 방지 온라인 생중계로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물론 이용수 선생님의 심경의 변화에는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살펴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토록 오랜 기간의 지난한 투쟁에도 여전히 답이 없는 일본정부, 피해자들을 한일관계의 걸림돌 취급해 온 한국정부, 벌써 많은 분이 세상을 등지게 된 상황 속에서 절박함과 갑갑함은 쌓여갔을 것이다.

일본군 전시 성노예 범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홍윤신 연구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일본 정부와 국제사회→한국정부→정대협 비판에서→결국에서 스스로가 서 있던 수요시위라는 공간 자체까지 부정하게 된 할머니의 좌절감과 아픔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지 않을까? … 이 모든 구조속에서 슬며시 숨어 <운동가>와 <피해자>의 대립구도만 부상하게 하는 언론 구조속에서 우리가 과연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일본정부에게, 한국정부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 왔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정의기억연대의 운동에도 당연히 성과뿐 아니라 수많은 오류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맞선 오랜 지난한 투쟁들을 가까이 안에서 살펴보면, 거기에는 바깥의 멀리서 보듯이 순결하고 정의로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연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온갖 인간적 결함과 갈등, 서로에게 준 상처와 문제점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운동이든 결국 불완전한 인간들이 좌충우돌하며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그런 문제들도 아프게 돌아보고 같이 바로잡으며 힘겹게 풀어나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도,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였던 윤미향 당선자의 남편까지 끌어들여서 다시 색깔론까지 꺼내들기 시작한 보수언론들의 야비한 마녀사냥식 몰아가기부터 분명히 막아서고 중단시켜야 한다. 그때 진정으로 생산적인 돌아보기와 토론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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