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1988년 한국기자협회보에 기고한 리영희의 글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

‘사상의 은사’ 리영희는 평소 언론과 언론인을 매섭게 비판했다. ‘언론인’이 아닌 ‘언롱인’이라는 멸칭은 30년이 지난 오늘 ‘기레기’라는 단어로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언롱인이 다시 언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리영희는 한국기자협회보에 1971년 발표한 글에서 답을 준다. “관료가 되지 말고 지식인이 되자.” 이 말은 “‘기자’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한 ‘관료적’인 가치관이나 관료적인 행동을 하지 말자”는 뜻이다.

그가 말했던 관료는 “현행의 질서를 지키고 관습과 규율을 존중하고 압력을 감수함으로써 변혁을 배격”하는 존재다. 리영희가 생각했던 이상적 기자는 ‘독립적·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기자’였다. 스스로 공부하고 행동하는 단독자로서의 기자. 오늘날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기자는 몇이나 될 것인가.

▲ ‘사상의 은사’ 리영희는 평소 언론과 언론인을 매섭게 비판했다.  사진=리영희재단.
▲ ‘사상의 은사’ 리영희는 평소 언론과 언론인을 매섭게 비판했다. 사진=리영희재단.

8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열린 리영희재단, 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의 10주기 세미나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에서 1부 발제를 맡은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의 문제의식이다. 

박 교수는 “리영희가 2020년 다시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라는 글을 쓴다면 무엇보다 먼저 조직의 통제와 낡은 관행의 구속부터 벗어던지라고 조언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기자들이 내부 힘에 종속되는 상황에 쉽게 눈을 감는다는 지적이다.

이를테면, 기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하는 객관주의 신화, 출입처 제도 관행, 사주와 간부들의 압력, 이데올로기로 결정된 뉴스가치 등을 ‘우상’으로 삼고 있다는 진단이다.

반면 기자 리영희는 “오늘의 우리 직업이 마치 ‘객관적 보도’라는 미국식 저널리즘의 몰사상 내지 몰가치적인 행위만으로 그 소임과 기능을 다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단편적 사실보다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고, “우리사회 신문들은 정론의 정의를 중립 또는 불편부당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해왔다. 그러나 중립이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며 ‘불편부당’이라는 단어 뒤로 숨은 언론을 비판했다.

박 교수는 언론의 정파주의적 비판이 ‘지식인 기자’를 막는 요인이라고도 진단했다. 그는 “한국정치의 고착화한 정파 구도 속에서 언론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정파의 과오에는 적극적으로 눈을 감지만, 반대하는 정파에는 과도하거나 불합리한 비판을 가하면서 언론에 주어진 비판의 자유를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를 위해 전유하고 있다”며 대표적 사례로 한일 갈등과 코로나19 국면에서 정부를 비판했던 보수언론들을 꼽았다.

▲ 8일 오후 서울 중구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열린 리영희재단·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의 10주기 세미나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에서 1부 사회를 맡은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왼쪽)와 발제를 맡은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 사진=김도연 기자.
▲ 8일 오후 서울 중구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열린 리영희재단·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의 10주기 세미나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에서 1부 사회를 맡은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왼쪽)와 발제를 맡은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 사진=김도연 기자.

리영희가 살아있다면 전통언론 비판뿐 아니라 소셜미디어, 팟캐스트, 유튜브 등 ‘탈언론’(박 교수 표현)에도 준엄한 비판을 가했을 것이라는 게 박 교수 주장이다. 탈언론은 낡은 우상에 갇힌 전통적 언론을 비판하며 성장했다. 탈언론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적 저널리즘보다는 해설이나 주장의 저널리즘에 가깝다.

박 교수는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무모한 추측에 근거한 음모론으로 발전하면 위험하다. 아예 악의적 허위정보까지 포함시킨다면 위험성은 한층 더 커진다”며 “(탈언론 시대는) 나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만 편향적으로 소비하며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는, 우리 편에 이득이 되느냐가 진실의 유일한 판별 기준이 돼버린 시대”라고 진단했다.

이 같은 현상과 대조적으로 리영희는 ‘공부하는 기자’였다. 그의 글쓰기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공을 들이는 실증적 글쓰기였다. 그의 특종 보도 대부분은 자료 수집과 학습, 분석의 결과물이었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일례로 1964년 한일회담 교섭 막바지, 대일재산청구권 문제가 걸림돌이 됐던 당시 리영희는 일본이 과거 점령 통치했던 베트남, 버마, 필리핀의 배상 사례를 연구해 현금 상환이나 개개인에 대한 상환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는 MBC 사장 임기를 마치고 뉴스타파 PD로 복귀한 최승호 PD가 자리했다. 최 PD는 “리영희 선생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대단한 탐구 정신”이라며 “전쟁터 참호 속에서 책을 읽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미군 장교들이 일본으로 휴가 갈 때 일본에서 나온 책을 사달라고 부탁해 그 책들로 전쟁터에서 공부하셨다고 한다. 실존적 자유인으로서 세계적 현상과 실상을 스스로 판단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최 PD는 “그는 민감한 기사를 썼다 싶으면 댁에서 며칠이나 옷을 벗지 않고 주무실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했다”며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그 시대에 민감한 기사를 쓴다는 것은 전문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엄정함이 요구된다. 리영희 선생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그가 제시한 ‘팩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라고 말했다.

▲ 8일 오후 서울 중구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열린 리영희재단·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의 10주기 세미나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에서 최승호 뉴스타파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8일 오후 서울 중구 뉴스타파 리영희홀에서 열린 리영희재단·한국언론정보학회 주최의 10주기 세미나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에서 최승호 뉴스타파 PD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KBS 부사장 출신 정필모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은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라며 “언론 역할은 폭넓게 맥락과 진실을 전달하는 일인데 현재 언론은 단편적 정보만 좇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언론 개혁’도 주요 주제였다. 오정훈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언론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개혁은 특정 언론을 쓸어버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며 “올바르고 제대로 된 보도를 하는 언론을 육성시키는 방식의 개혁이 필요하다. 미디어 노동자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제도와 민주적 의사소통 구조가 있는 언론이 살아남아야 한다. 이와 달리 민주적 소통을 말살하고 잘못된 관행을 방치하는 언론은 퇴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당선인은 “제도권 언론이 팩트를 비틀어 보도하는 행태가 여전하다”며 “언론 당파성 때문이다. 특히 보수언론이 프레임을 만들면, 비판적 언론도 프레임 안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다. 이걸 깨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한 뒤 ‘언론 소비자 운동’을 통한 언론 개혁을 주문했다.

2부 발제자인 정용준 전북대 교수는 “선생님이 그토록 질타했던 ‘강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기회주의 언론’의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급기야 국민들은 조국 사태를 계기로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을 외치고 있다. 선생님의 실천적 지식인에 기반한 언론 사상을 지금의 언론 개혁으로 승화하는 것은 우리들 의무이자 시대적 책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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