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동안 국내외를 들썩이게 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건강이상설과 사망설이 김 위원장의 등장으로 무색해졌다. ‘지난주에 사망, 99%’ ‘혼자 못걸어’ 등 극단적이고 단정적인 주장을 편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도 문제지만, 이들의 주장을 검증없이 받아쓰면서 증폭시킨 큰 책임은 언론에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하루전날까지 사망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는 점에서 역대급 보도 참사라는 평가다.

허위지라시와 가짜영상을 제작 유포한 이들에 고의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해소되지 않았다. 의문이 본격 확산될 때는 김정은 건강상태로 잔뜩 옮겨쓰며 열독률과 시청률을 올린 매체들은 김 위원장이 등장하자 자신들의 보도태도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김정은 위중설에 불을 지른 CNN은 사과는커녕 입장표명도 하지 않고 있다.

시작은 지라시, 미국 CNN 보도로 빗장 열려… 사과없는 CNN

김정은 위중설의 시작은 거슬러올라가면 이른바 ‘지라시’부터였다. 총선 전날인 지난달 14일 정치권과 언론계엔 출처불명의 지라시가 돌았다. ‘김정은 수술실패로 뇌사상태 준하는 심각한 상태’, ‘김여정이 백두혈통으로 명목상 표면에 나올 확률’ 등의 내용이었다. 청와대도 이 내용이 돈다는 것을 총선 전후로 파악하고 있었다. 15일 김정은 위원장이 태양절 행사에 불참하자 한 북한 연구책임자가 김정은 건강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음 들고나왔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17일 김 위원장의 태양절 태양궁전 참배 불참을 들어 “불경스러운 사건”이라며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이나 신변에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이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중앙일보 등이 이 주장을 보도했다.

데일리NK는 20일자 기사 ‘김정은, 최근 심혈관 시술 받았다… 여전히 특각서 치료 중’을 통해 처음으로 심혈관 시술설을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이튿날인 21일 CNN이 김정은 위원장이 수술후 위중한 상태라는 정보를 모니터하고 있다는 미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건강 위중설’을 방송하면서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청와대와 통일부가 곧바로 북한 내부에 특이 동향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반박했지만 오히려 곳곳에서 시술설, 수술설, 위중설이 나오는 등 김정은 건강상태 의혹의 빗장이 열렸다.

같은날(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윤상현 의원(전 미래통합당 소속)이 심혈관 수술을 받은 것은 맞는 것 같다고 주장했고, 지성호 당선자가 돌연 뇌사 상태, 위독한 상태라는 주장을 폈다. 뉴스핌은 21일 ‘[단독] 정부 부인했지만… 지성호 “김정은 중태 맞다. 위독한 상태”’ 기사에서 지성호 나우 대표가 “상태가 상당히 안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부터 건강상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태영호(당시 태구민) 당선자도 같은날 입장문을 내어 “김정은의 신변 이상설이 보도된 후 일주일이 넘은 지금까지도 북한이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매우 이례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태구민 “정말 이상한 건, 김정은 위중설에도 반응없는 北”’이라고 보도했다.

일부 매체는 대놓고 지라시 내용까지 소개했다. 위키트리 21일자 ‘“김정은 현재 뇌사 상태… 여동생 김여정이 권력 잡는다” 지라시 급속 확산’, 인사이트 등 인터넷 매체 뿐 아니라 동아일보 22일자 ‘김정은, 6년전엔 40일 잠적… 지팡이 짚고 나타나’ 등 오류가 있다면서 지라시 내용을 상세히 전한 매체도 많았다. 지라시 내용에 있는 ‘3인방’ 가운데 한 명인 김양건은 이미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위독·사망설 보도 일지. 정리=조현호 기자, 그래픽=안혜나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위독·사망설 보도 일지. 정리=조현호 기자, 그래픽=안혜나 기자

 

26일엔 과거 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서거 때 영상을 김정은 위원장으로 덧씌워 조작한 동영상이 유포되기도 했다. 지라시와 영상의 경우 고의로 김정은 뇌사설을 조작 유포하고자 한 혐의가 짙다.

통일뉴스는 이와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 서거기사를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지난달 24일 김정은 사망 예비기사를 노출했다가 삭제하는 일도 있었다.

CNN의 김정은 건강위중설의 경우 다른 사망설 유포 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도 사과는커녕 아직 아무런 오보예측 경위와 해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장성민 지성호 태영호 주장 여과없이 보도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주장을 검증없이 보도한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다. 태 당선자는 27일 CNN 인터뷰에서도 “확실한 것은 제대로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보도는 문화일보를 비롯해 수십여개 매체가 인용했다.

김정은 위중설 허위 주장의 정점은 지성호 당선자의 “김정은 사망 99% 확신” 인터뷰다. 가장 먼저 이 내용을 인터뷰한 곳은 뉴시스였다. 뉴시스는 지난달 30일 ‘지성호 “김정은 사망 99% 확신… 심혈관 수술 후유증”’ 기사에서 지 당선자가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주말에… 수술로 인한 쇼크 상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내부 소식통에 근거한 것이라 전했을 뿐 소식통의 신뢰성 여부는 나타나있지 않다. 이 기사에 이어 경쟁적으로 지 당선자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1일자 ‘지성호 “김정은 지난 주말 사망… 99% 확신” 주장’에서 지 당선자는 “이르면 이번 주말, 늦으면 다음 주 중 북한이 김정은 사망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고 썼다.

특히 SBS는 1일 오후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지성호 당선자를 출연시켜 생중계로 김정은 99% 사망 주장을 방송했다. 주영진 앵커가 ‘어떠한 근거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셨나’, ‘이제는 탈북민 출신의 인권운동가가 아니다. 말 한마디 무게가 예전과는 다르다, 통일부 장관이 특이 동향 없다고 하는데도 99% 사망 근거에 자신하냐’고 물었지만 지 당선자는 “북한이라는 곳에 100%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99%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 앵커는 “그 내용이 맞을 경우와 틀릴 경우 지성호 당선자가 아마 우리 시청자 분들에게 합당한 태도를 보이셔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든다”고도 언급했다. 하지만 지 당선자는 김 위원장이 99% 사망했고, 이르면 내일(2일)쯤 북한이 김 위원장 사망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시각 김정은 위원장은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을 둘러보고 있었다.

김 위원장이 20일 동안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주요 행사에도 불참해 의구심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곧장 건강 이상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의문이 있더라도 신중하게 판단하고 유보적으로 접근해야 함에도 언론은 극단적이고 단정적 주장을 펴는 사람의 말을 여과없이 중계했다. 특히 지성호 당선자 주장의 경우 왜 99% 사망했다는 것인지, 수술 후 후유증 탓이라는 근거는 어떻게 확인했는지 등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4일 밤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태영호·지성호 당선자이 반성하고 사과했다면 데일리NK와 CNN, 로이터뿐 아니라 이들 주장을 전파, 확산, 증폭시킨 언론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언론도 함께 사과하고 자정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양 교수는 “최소한의 교차 검증 없이 썼다는 점에서 언론은 할말이 없다”며 “지성호·태영호가 희대의 가짜뉴스 생산자라면 그 한 축인 유통자로서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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