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사전투표조작설’ 유포에 참여했다.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는 지난 4일 박상현 전 통계학회장(서울대 통계학과 명예교수)를 인터뷰해 “사전투표 결과 통계적으로 이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은 지난달 20일 “음모론은 그만, 못나서 진 거다”라는 칼럼에서 조작설을 ‘철 지난 음모론’으로 일축하며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의 쇄신을 요구했다. 다음날에는 기사로 조작설 쟁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동아일보도 지난달 21일 ‘팩트체크’로 조작설을 반박했고 중앙일보는 지난달 20일 ‘전영기의 시시각각’에서 “음모론보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번 인터뷰는 그동안 조작설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온 조선일보의 입장변화다. 다만 전조는 있었다. 

▲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월10일 서울역에 마련된 남영동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월10일 서울역에 마련된 남영동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지난달 27일 최 기자는 통합당 김해을에 출마했다 낙선한 장기표씨를 인터뷰했는데 여기서 조작설을 슬쩍 거론했다. 장씨가 “본 투표에서 106표(0.13%)차로 아쉽게 밀렸지만 사전투표에서 여당표가 쏟아져 무려 22.7% 차이가 났다”고 하자 최 기자는 “이게 선거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이 현상인지, 일각에서 제기하는 사전투표조작 의혹과 관련된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겠군요”라고 했다. 곧바로 질문으로 넘어가 장씨의 답을 담지 않았다.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 사족이었다.  

더 거슬러 가면 지난달 23일 조선일보 공식유튜브 채널 중 한 코너인 ‘김광일의 입’ 중 “‘선거부정 있었다’는 박영아 교수 주장 검증하려면”편에서 조작 의혹을 다뤘다. 김광일 논설위원은 서두에 조작설 반박 기사들을 잠깐 소개하다가 선거직후 제기되는 조작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방송을 채웠다. 조선일보 지면에서 정치부 기자들이 조작설을 반박하는 가운데 편집국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선배 그룹이 조작설의 운을 떼온 것이다. 

▲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 중 '김광일의 입'(위)과 구독자수가 가장 많은 보수유튜브 채널 신의한수
▲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 중 '김광일의 입'(위)과 구독자수가 가장 많은 보수유튜브 채널 신의한수

 

‘김광일의 입’은 조선일보와 보수(극우) 유튜버들의 중간다리 역할이다. 김 논설위원은 조선일보 문화부장·국제부장 등을 거쳤고, TV조선에서 지난 2018년 6월 ‘강진 여고생 피살사건 모욕논란’, 8월 ‘장애인 비하발언 논란’으로 물의를 빚다 결국 11월 ‘김광일의 신통방통’에서 하차한 인물이다. 이후 조선일보 유튜브의 한 코너인 ‘김광일의 입’에서 유튜버 대열에 합류했다. ‘김광일의 입’ 방송 영상과 주요내용은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기사형태로도 실린다.

보통 보수유튜버들은 극단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식으로 사안을 다루지만 그에 비하면 ‘김광일의 입’은 기계적 균형을 갖추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김정은 사망설’을 다룰 때도 김정은 사망설 보도와 반박근거를 소개한 뒤, 김정은 사망을 가정했을 때 김여정 체제가 가능한지를 분석하는 식이다. 형식상으론 다른 유튜버들과 다르지만 방송의 방향은 유튜브 여론에 맞추고 있다.   

좋게 해석하면 조선일보 내에서 취재기자들이 담지 못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다른 말로 조선일보가 보수유튜브 시장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김 논설위원처럼 최 기자 역시 음모론에 한발 거리를 뒀다. 인터뷰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사전투표조작설이 제기됐을 때 진지하게 다룰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부 보수 인사도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보수는 선거 패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칫 ‘선거 불복’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다. 과거 선거에서도 진 쪽은 그럴듯한 ‘음모론’을 만들어냈지만, 얼마 못 가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판명나곤 했다.”

▲ 지난 4일 '최보식이 만난사람' 인터뷰 기사
▲ 지난 4일 '최보식이 만난사람' 인터뷰 기사

 

최 기자는 인터뷰 내내 조작설에 비판적인 태도로 접근해 소위 ‘빠져나갈 길’을 열어놨다. 해당 기사는 곧 다수 유튜버가 ‘역시 최보식’ 등의 반응을 보이며 자신들 주장의 권위를 부여할 근거로 활용했다. 조선일보가 6일 칼럼들에서 ‘김정은 사망설’을 반성하긴커녕 사망설 보도 이후 혼란 상황에서 김정은 사망 이후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는 논리를 펴며 현 정부 대북관을 비판했다. 김정은 사망설로 10여일간 장사해온 유튜버들이 취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조선일보 유튜브 채널 영상 중 ‘김광일의 입’ 코너의 조회수가 가장 높고 중앙일보나 동아일보 유튜브 조회수를 압도한다. 지난달 23일 ‘선거부정’을 다룬 편은 조회수 53만을 넘겼고 보통 영상들도 10만을 훌쩍 넘긴다. 이는 보수유튜브 1위를 달리는 ‘신의한수’ 평균적인 영상당 조회수와 비슷한 수준이다.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겨뤘던 지난 2012년 대선 직후 패배한 민주당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개표부정선거 의혹이 나오자 이에 일부 동조했다. 다수 매체에서 민주당이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박지원 원내대표는 “수개표 청원자가 23만명이 넘어 그냥 방치하면 등을 돌릴 것”이라며 지지자들을 달래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진위 여부나 민주주의 차원의 시비를 떠나, 정치시장에서 지지자들을 챙기는 게 정치인들의 ‘필요악’이라 한다면 조선일보의 조작설 관련 인터뷰는 궁지에 몰린 일부 지지층이 원하는 얘기를 들려주는 정치 행위다. 동시에 조선일보만의 영향력으로 선거판을 흔들지 못하는 미디어 구조에서 ‘1등 신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차별화 전략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 TV조선 ‘김광일의 신통방통’ 장애인 비하 논란]
[관련기사: 법정제재 받고 하차하는 TV조선 진행자의 ‘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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