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사들이 차량운전사들을 무더기 해고했다. ‘파견근로자 보호를 위한 법률’이 시행 2년째에 접어든 2000년 일이다. 2년 일한 파견근로자 직접고용 의무를 피하려는 부당해고였다. 지금은 파견법이 ‘파견근로자 보호’ 명목과 달리 고용불안을 부추기는 현상을 드러내는 대표 사건으로 꼽히지만, 당시엔 낯선 현상이었다. 비정규직 양산이 본격화하는 시기였다.

“당시엔 노동을 다루는 언론도 워낙 없었고, 한다 해도 ‘경제 위기에 얼마나 많이 해고됐나’를 주야장천 얘기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공간을 만들자는 뜻이 컸어요. 준비호까지 치면 최초이고 유일해요.” 2002년 10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월간 기관지 ‘질라라비’ 창간 당시 얘기다. 질라라비가 이달 200호를 맞았다. 창간 멤버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를 지난 17일 서울 공덕역 인근에서 만났다.

질라라비는 순우리말로 ‘해방자’다. 18년 간 지면을 관통한 열쇳말은 ‘현장’과 ‘불안정 노동’이다. “우리의 목표는 정규직화가 아니다. 정규직 역시 노동강도 강화와 경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와 정주,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영세사업장과 대기업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노동의 불안정화를 공통으로 마주한다.” 창간호의 한 대목이다.

▲2002년 10월 질라라비 창간부터 함께한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가 서울 공덕역 인근 커피숍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2002년 10월 질라라비 창간부터 함께한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가 17일 서울 공덕역 인근 커피숍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지면은 매월 현장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신순영‧임용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활동가가 월간 기획과 섭외를 담당한다. ‘나무’ 예명을 쓰는 박원종 활동가가 편집 디자인을 맡는다. 편집자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꼭지는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전략과 실천’이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현장 목소리를 담고 있다. 

김혜진 활동가는 “노동자들은 대개 기성 언론에 불쌍하고 힘든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이 꼭지는 비정규 노동자가 실은 어떻게 주인이 돼 변화를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힘들게 노동자를 만나고, 노조를 제안하고, 노력하는지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장 섭외가 험난한 꼭지이기도 하다. ‘투쟁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리지만 노조 조직까지 나아가는 물밑 움직임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호를 훑어보면 주제가 다양하다. 건강과 비정규직, 집시법과 비정규직, 심지어 사법개혁과 비정규직까지 연결해 다룬다. 김혜진 활동가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사건이 비정규직의 눈에 어떻게 해석되고, 이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 철폐연대만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사진‧노래 활동가들을 조명하고, 진보언론의 역할과 위상을 다루는 특집도 냈다.

표지에 드러난 구호는 20년 가까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창간호에 포함된 ‘파견법 철폐’ 표어는 100·200호에선 ‘비정규직 철폐’가 됐다. 김혜진 활동가는 바뀐 문구가 불안정 노동이 보편화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현재도 파견노동포럼을 열어 파견법 철폐를 주요 의제로 다루지만, 하나의 법이 사회적으로 안정되면 상수가 되고 모두가 그 기반 위에서 생각하게 되는 면이 있어요. 간접고용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법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차츰 희미해지는 거죠.”

▲왼쪽부터 질라라비 준비7호, 창간호, 167호, 100호, 200호.
▲왼쪽부터 질라라비 준비7호, 창간호, 167호, 100호, 200호.

기성 언론이 짚지 못한 본질을 꿰뚫기도 한다. 불안정 노동 문제를 최전선에서 전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2006년 말 우리은행이 창구담당‧사무지원‧콜센터 3100명 정규직화 조치를 발표했다. “모두가 우리은행 결정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훌륭하다고 칭찬했어요. 하지만 뜯어보면 직군을 기존 정규직과 분리해 임금과 처우 차별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어요.” ‘무기계약직’의 출현이다. 정지현 활동가는 기고로 ‘새로운 형태의 비정규직’이라고 지적했다. 2009년엔 민간위탁 확대를 골자로 한 고용서비스 선진화 정부안을 즉각 지적해 내부 논의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200회 특집호엔 이운남·윤주형·박정식·최종범·염호석·김용균 등 7명의 비정규직 열사를 기리는 현장 기고와 인터뷰를 실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4인 이하 사업장 △산재사망 △플랫폼노동 등 뜨거운 노동계 현안 분석과 전망을 다뤘다. 회원 700여명 중 일부 구독자의 ‘질라라비 사용법’ 기고도 담았다.

그는 질라라비의 열쇳말을 두고 “철폐연대만이 한다고 자랑했지만, 사실 모든 언론이 다룰 수 있는 얘기”라고 했다. 

“대다수 언론보도를 보면 노동자 움직임의 ‘기승전결’을 다뤄요. ‘아사히글라스의 비정규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었더니 징벌 조끼를 입혔다. 해고돼 싸웠고, 불법파견 소송에서 이겼다.’ 하지만 하나의 업장을 둘러싸고도 수십 가지 문제가 있어요. 노동자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고, 심지어 즐거워 보일까. 검찰은 왜 끊임없이 불법파견하는 회사 편을 드나. 정부는 왜 외투 기업에 봐주기로 일관하나. 왜 불법파견을 인정 받고도 교섭이 안 이뤄질까.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먼 얘기가 아니라 우리 삶과 맞닿은 문제로 느끼도록 하는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오는 24일 저녁 6시30분 서울 영등포구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강당에서 200호 발간기념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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