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은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창출하는 독립적 정치 결사체인줄 알았던 정당이 대놓고 다른 정당 주변을 도는 ‘위성’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선거였다. 경기에서 선수나 다름없는 정치인들이 법으로 확정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대놓고 무시했고, 현실에선 누가 더 기만적 반칙을 하느냐에 따라 이득을 얻는다는 것도 이번 선거에서 확인했다. 

거대 양당은 선거 국면에서 정책과 의제를 내세우지 않았고, 급조된 정당들은 숙성되지 않은 공약들을 남발했다. 정책과 공약이 선거의 중심이었던 적이 드물지만 민주화 이후 21대 총선만큼 의제가 실종된 선거는 없었다.

선거에서 실종된 의제는 오히려 코로나 19로 드러났다. 전염병은 경제활동을 위축시켰고 취약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위험해졌다. 3월 고용 행정 통계를 보면 지난 3월 구직급여 신규 신청자는 15만6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4.8% 늘었고, 한 달간 구직급여 지급액은 총 8982억원으로 역대 최대액이었다. 기존 일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 고용보험 가입자가 경제활동인구 2700만여명의 절반 정도인 1375만명에 불과하다. 소득 중단에 대한 안전망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란 의미다. 그런데도 이 고용보험 가입자 숫자는 더 줄었다. 3월 고용보험 신규 가입자는 69만명이었고 해고·이직 등으로 고용보험을 상실한 이는 72만명이었다. 코로나 19가 더 장기화하면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소득 감소나 상실의 여파가 미치고 고통도 더 클 것이다. 결국 선거 대신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 누적된 문제들을 드러내며 정치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 지난 4월13일 연합뉴스TV ‘고용위기 현실로… 3월 구직급여 역대 최대’ 보도 갈무리. 사진=연합뉴스TV 유튜브
▲ 지난 4월13일 연합뉴스TV ‘고용위기 현실로… 3월 구직급여 역대 최대’ 보도 갈무리. 사진=연합뉴스TV 유튜브

다행히도 이번 코로나 방역에서 정부와 공공부문은 신속하고 유능한 대응 능력을 보여줬다. 정보 혼선이 거의 없었고, 신속하게 많은 사람들을 검진했으며 마스크 배부와 병상 확보에서도 해결 능력을 발휘했다. 정치가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할 때 정부나 공공부문이 무능해서 일을 못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 이번 방역 국면에서 확인됐다. 이제 관건은 우리 사회 문제를 풀려는 의지가 진정 정치권에 있느냐다. 

선거 결과도 정치권 역할을 주문한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결과는 역대 최초로 보수 정당이 차지한 의석수가 전체의 3분의1 남짓이란 점이다. 이는 시대착오적 이념 공세나 하는 퇴행적 보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란 해석이 다수다. 또 다른 의미는 국회서 정책 논의가 본격화할 가능성이다. 정책에 대한 무관심은 정당을 막론하고 한국 정치 전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치 현장에서 접한 경험은 조금 달랐다. 

필자가 기자로서 접한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 보수정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책적 사안에 대한 질의에 아예 응하지 않았다. 당 지도부나 대변인 논평이 있던 사안에 대해서만 답변할 뿐 상임위와 관련한 정책 의제에 대해선 입장을 밝히길 부담스러워했다. 

필자는 2014년 9월 국회 환경노동위 국회의원 1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 있다. 당시 정치권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현안은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정리해고나 민영화 등에 대항하는 파업이 불법화하는 문제, 특수고용직의 노동 기본권이 제한되는 문제, 노동자들이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가압류로 시달리는 문제 등에 대한 질의를 만들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미 누적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환노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 8명 가운데 한 명이라도 답변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정의당 소속인 이자스민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설문에 응해 대상자 16명 가운데 9명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이자스민 의원의 보좌관은 “(우리 당에서) 혹시 우리 의원님만 답변했나요?”라며 당 지도부가 불이익을 줄까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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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대 총선에 비례대표 후보를 낸 정당들의 선거공보물. 사진=이우림 기자
▲ 21대 총선에 비례대표 후보를 낸 정당들의 선거공보물. 사진=이우림 기자

21대 국회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예측하긴 어렵다. 아마 실망스런 모습도 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우리 사회 구조적 문제와 대안에 대한 입장을 국회 상임위에 구체적으로 질의하고 정치권이 적극 정책을 마련하도록 유도했으면 한다. 어떤 사안을 묻고, 어떤 대안을 강구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있다. 바로 대선 공약집이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제는 대선 공약집을 다시 꺼내 봐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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