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 배우 시절 내가 전혀 슬프지도 않고 울고 싶지도 않은 상황에서 울어야 했어요.”
“감독은 내가 울지 않으면 울으라고 소리치고, 심지어 (눈물을 억지로 내기 위해) 담배 연기를 눈에 갖다 대기고 했어요.”

이런 충격적 발언을 한 사람은 누굴까. 배우로는 물론 힙합 가수로서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양동근이다. 양동근은 1987년에 KBS 드라마 ‘탑리’로 데뷔한 이후 29년이 된 2015년이 되어서야 지금은 종영한 SBS 요리 프로그램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에 출연해 어린 시절 겪은 폭력을 짧게나마 말할 수 있었다.

왜 양동근은 29년차 중견 배우가 되어서 겨우 자신이 겪은 폭력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를 조금 바꿔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바꿀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남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커리어를 쌓을 정도로 성장했기에 방송에 출연하여 이를 말할 수 있었다고. 동시에 이는 완전히 배우 생활을 그만두지 않은 이상, 자신이 방송 현장에서 겪은 폭력과 고통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문 현실과도 이어진다.

아동·청소년 연기자가 촬영 현장에서 많은 스트레스에 직면하다는 것을 증언한 것도 양동근이 처음이 아니다. SBS 전설적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박미달’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우 김성은은 2005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처음으로 아동·청소년 연기자로서 겪은 어려움을 말한 뒤로, 인터뷰가 게스트로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순풍 산부인과’ 시절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술회한 바 있다.

‘박미달’ 역할은 무척이나 활발하고 온갖 말썽을 부리는 소위 ‘사고뭉치’형 캐릭터다. 심지어 캐릭터 이름인 ‘미달’도 당시 ‘순풍 산부인과’의 연출을 맡았던 김병욱 PD는 ‘수준미달’이라는 뜻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명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등장할 때마다 온갖 사고를 치는 캐릭터기에 시청자들에게는 많은 웃음을 낳은 존재였지만 배우 본인은 해당 캐릭터로 인해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 등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또한 주 5일 방영하는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장시간, 밤샘 촬영이 이어졌고 제대로 학교 수업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김성은 본인은 2019년 12월에 출연한 KBS2의 토크쇼 ‘해피투게더4’에서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미달’이라는 이름이 감사하다”고 밝혔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기 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들이 나온 이후에도 여전히 방송에 출연하는 아동·청소년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권 감수성 자체가 희박했던 1980년대, 1990년대와 달리 2020년이 된 지금은 최소한 아동·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는 형성되었다. 동시에 KBS를 비롯한 몇몇 방송사에는 아동 보호를 위한 제작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은 과연 잘 지켜지고 있을까. 지난 2019년 10월에는 더불어민주당 김성수 의원이 방송통신위원회를 통해 제출받은 방송사별 아동 보호를 위한 제작 가이드라인을 분석한 결과 지상파 공영방송 3사(KBS·MBC·EBS)의 경우 가이드라인에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불건전하거나 부당한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있었지만, 아동·청소년 출연자 근로시간·휴식시간·성(性)보호 등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SBS의 경우에는 애시당초 제작 지침에 아동 출연자에 관한 조항 자체가 없었다. 대신 TV조선은 아동 프로그램 제작시 전문가 자문을 필수적으로 명시하고 구체적인 근로 규정, 인터뷰시 유의사항, 성보호 등에 대한 규정을 명시하여 김성수 의원은 지상파가 TV조선보다도 아동·청소년 권리 보호에 미흡하다고 지적을 했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지상파 공영방송사보다 더욱 세부적으로 아동·청소년 제작 가이드라인을 갖춘 TV조선은 최근 그 체면을 구기는 문제를 저질렀다. 문제의 프로그램은 전작 ‘내일은 미스트롯’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했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이다. 중장년층에게 화제가 된 프로그램에서 많은 출연자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 유독 주목을 받는 참가자가 있었다. 바로 만 13세의 나이로 결승전까지 진출한 정동원 참가자이다. 어린 나이에도 다양한 트로트를 자신의 개성이 잘 담아내며 소화한 덕분에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아온 참가자였다. ‘내일은 미스터트롯’이 화제가 되었던 것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지만 정동원의 존재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하지만 TV조선은 정작 정동원 참가자를 통하여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높였지만, 정동원 참가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자세를 결승전에서 드러냈다. 대다수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렇듯 ‘내일은 미스터트롯’ 역시 결승전은 3월 13일 깊은 밤이 된 밤 10시에 시작해 그 다음 날 새벽 1시 30분까지 방영했다. 본래 결승전은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유행 관계로 결승전은 사전에 녹화하고, 사전 녹화분 방영이 끝난 새벽 0시 48분부터 생방송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방송했다. 그러나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 의하면 만 15세 미만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은 원칙적으로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활동을 할 수 없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취해야 할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송사들 보다도 엄격한 아동·청소년 촬영 가이드라인을 지닌 TV조선은 정작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는 현행 법령은 물론 자신들이 만든 가이드라인조차 스스로 지키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오히려 세이브더칠드런을 비롯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개선을 위한 팝업’ 등의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하자 TV조선은 “정동권 군 본인이 현장에 참석하기를 간곡히 원했고, 아버지 또한 이를 수락해서 가족 동의 및 입회하에 방송 참여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TV조선이 진정으로 정동원 참가자를 신경썼다면 방송 시간대를 조정하는 선택지를 택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은 시청자를 모아 광고를 모으기 위해 결승전 방송 시간대를 최대한 늦추는 것처럼, TV조선 역시 광고비를 우선시 했을 뿐이다.

다른 방송국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KBS2는 2020년 현재 ‘슈펴맨이 돌아왔다’를 비롯하여 ‘살림하는 남자들 2’, ‘날아라 슛돌이 뉴 비기닝’을 비롯하여 방송사 중에서는 가장 많은 아동·청소년 출연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특히 이 세 방송 프로그램은 모두 아동·청소년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 ‘관찰 예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에서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세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동시에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의 상당수는 프로그램이 본래의 방영 목적인 ‘연예인 남성이 아내 없이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 도전기’와 전혀 상관 없는 행보를 걷고 있으며, 이와 함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동·청소년이 크고 작은 폭력적 상황에 시달리고 있다는 차원의 지적이다.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지난 3월 15일 방송에서 힙합 듀오 ‘리쌍’의 멤버 ‘개리’가 자신의 아들 앞에서 권투 수련을 하던 중 강펀치를 맞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연기’를 하며 아들이 큰 충격을 받고 계속 우는 장면을 보여주며 논란이 됐다. 연출 자체도 인위적이지만, 아직 27개월 밖에 안 된 어린 아이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크게 다친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 큰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등장하는 아동·청소년이 눈물을 터트리는 상황을 연출하여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는 명목으로, 훈육을 위한 명목으로 제작진은 어린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계속 카메라에 담으려고 시도한다. 어디 그 뿐이랴. 무척이나 추운 겨울, 최근 들어서 점점 심해지는 여름의 폭염 속에서도 제작진은 지속적으로 야외 촬영도 강행하며 프로그램에 담길 ‘이미지’에만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은 단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시청률’과 광고 수익, 그리고 ‘이미지’인 것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화면. 

물론 이런 상황을 심화시키는 것은 제작진만의 잘못은 아니다. 앞서 지적한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을 비롯해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비롯한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다수 TV 프로그램은 꾸준히 안정적 시청률을 모으고 있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동·청소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엄연한 한 명의 ‘사람’이지만, 다수 시청자들은 이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거나 신경쓰지 않고 프로그램을 감상한다. 설사 이러한 프로그램들에 대해 이따금씩 지적하는 기사가 나오면, 자신들이 프로그램에서 느끼는 감동과 재미를 강조하며 지적 자체를 폄하하거나 욕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방송사와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들은 일종 ‘공동정범’이 돼 오랜 시간 동안 TV 프로그램에 적절한 가이드라인이나 규칙 없이 아동·청소년을 도구로 투입하기를 반복했다. KBS나 MBC, EBS 같은 공영방송 역시 시청률과 광고 수익에 눈이 멀어, 아니면 애당초 깊은 생각 없이 비슷한 행보를 반복해서 걸어왔다. 그나마 2019년 7월 KBS2에서 조금은 재미적인 요소를 줄이고 좀처럼 육아가 쉽지 않은 현실에 초점을 두어 제작한 관찰 예능 ‘아이를 위한 나라는 있다’를 방송했지만 시청률 저조 등을 이유로 같은 회 11월 18회를 끝으로 폐지된지 오래다.

그러나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사 혼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동·청소년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함께 방송을 만들고 제작하는 ‘동반자’격인 존재이다. 자신들의 시청률과 광고비 확보를 이유로 아동·청소년을 도구로만 취급하는 방송사는 아동·청소년 이외의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도구로 여기고 있을까. 아동·청소년을 방송의 도구로만 여기는 한국 방송계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한국 방송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심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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