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귀머거리야?” 일 년 반 동안 김수현씨가 매일 들은 말이다. 직업전문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입사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ㄹ’ 부띠끄는 유명 모델 출신 대표가 운영하는 곳으로 왕국이라 불릴 만큼 패션계에서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김수현씨도 익히 들었지만 못 버틸 거 뭐 있을까 싶어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디자이너로서 성장해 자기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큰 목표를 안고. 

디자인실은 ‘전쟁터’였다. 9시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쉴 시간이 없다. 점심시간은 20분. 직원들은 대표가 만든 직원예배를 싫어했지만, 수현씨는 예배드리는 게 좋았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한 달에 한 번 ‘하느님을 위해 할애하는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 시간이 없다. 휴대폰을 갖고 있으면 놀고 있다고 혼나고 걸어 다니면 일 안 한다고 혼났다. 혼나지 않으려고 안 바빠도 항상 뛰어 다녔다. 매일이 야근이었고, 일은 집에서도 계속됐다. 쇼가 있는 때면 18시간 씩 일했다. 그렇게 일하고 최저임금을 받았다. 야근수당도 없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누구는 차비만 준다던데, 그에 비하면 많이 주는 거라 생각했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뭐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자이너로 입사한 그가 하는 일은 대표의 심부름이 전부였다. 주로는 원단이나 패턴을 찾아오라는 지시였다. 언제 뭘 시킬지 알 수 없어 화장실도 제 때 가지 못했다.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시켰고 바느질은 오로지 대표와 실장만 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로 들어왔지만 청소부터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하는 ‘하녀’에 불과했다. 

여기서 십 년을 일해도 디자이너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부띠끄 디자이너도 생각처럼 괜찮은 직업이 아니었다. 패션쇼하는 날 하루, 무대에서 잠깐 빛나 보일 뿐 모든 게 환상이었다. 힘들 게 일하는 건 둘째 치고, 부띠끄가 사기처럼 느껴졌다. 5천 원짜리 원단도 디자이너 이름만 넣으면 30만 원 짜리 최고급 티셔츠가 되었고 중국에서 싸게 사 온 의류에 상표만 바꿔달면 10배 넘는 가격에 팔 수 있었다. 라벨갈이는 유명 부띠끄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그만두고도 싶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다. 

▲ 옷 디자이너. 사진=gettyimagesbank
▲ 옷 디자이너. 사진=gettyimagesbank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건 폭언이었다. 시작은 디자인실 실장, 대표의 조카였다. 이유는 없었다. ‘꼴보기 싫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서서 일하면 서 있다고 욕을 먹었고 앉아 있으면 길을 막고 있다고 ‘쌍욕’을 들었다. 멱살을 잡고 무릎을 꿇리기도 했다. 옷차림을 지적하며 수치심을 주고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며 정말 끔찍했다는 수현씨 표정은 암울했다,

“실장 앞으로 지나가면 안 돼요. 뒤로 돌아가야지 감히 내 앞을 지나가느냐고 해요. 일부러 발을 밟거나 어깨를 밀치고 가요. 그냥 마음에 안 들면 멱살 잡고. 뜨거운 커피를 제 손에 부은 적도 있어요. 잘 못 들으면 귀머거리냐, 치마 입으면 술집 여자 같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요. 다른 직원들한테 저랑 말하지 말라고 해서 저를 왕따 만들었죠. 그런 게 상처가 되더라고요.”

더는 참을 수 없어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수현씨는 이내 후회했다. 실장은 그 뒤로 귀에 대고 속삭이듯 욕설을 퍼부었다. 덩달아 대표의 욕설과 비난까지 갑질은 두 배가 되었고 상처는 그에 몇 배가 되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 대신 죽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매일 술을 마셨고, 매일 울다 잠이 들었다. 괜찮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그 때 뿐이었다. 오늘은 무슨 욕을 들을까, 또 언제 혼날까 늘 불안했고 정말 죽일 듯 쏘아붙여 심장이 두근거렸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목표 따위는 위안이 돼주지 못했다. 병원을 찾았고 약물치료를 처방받았다. 먹어야하는 약만 한 주먹이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마태복음 25장 26절. 대표가 입에 달고 다니며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달란트 비유였다.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가 그대로 한 달란트를 돌려준 종을 쓸모없다 꾸짖으며 내쫓는 내용이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하는 직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분명했다. 수현씨가 해고되고 나오는 마지막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단을 찾아오라고 시켰다. 가져오라는 원단을 하루 종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못 찾겠다는 말에 대표는 당장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수현씨 가슴팍을 여러 번 찌르듯 밀쳐냈다. ‘니 속셈을 모를 줄 아냐. 일부러 잘려 실업급여 타먹으려는 속셈 아니냐’는 말도 수현씨 가슴을 찔렀다. 성경에도 때리며 가르치라고 나온다는 말에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회사를 나왔지만 그만 둘 생각은 아니었다. 다시 대표를 찾아갔고 내키지 않는 사과를 먼저 건넸다. 대표는 욕설과 고함으로 사과에 답했고 달란트 비유를 들며 다신 볼 일 없다고 내쫓았다. 수현씨는 그대로 지방노동위원회로 갔고 대표를 부당해고로 신고했다. 

지노위에 찾아가 신고했지만 막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정의당 비상구를 만난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비상구가 뭔지도 사실 몰랐다. 비슷한 시기에 일을 그만둔 디자이너 J씨가 먼저 정의당을 찾았다. 얘기를 들어주는 곳은 정의당이 유일했다. 이정미 대표에게 갑질 내용을 담은 글을 보냈고 비상구 도움으로 언론에 제보할 수 있게 됐다. 

슈퍼 갑질로 기사가 나가자 대표는 수현씨와 J씨를 곧바로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수현씨도 갑질과 폭언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라벨갈이와 임금체불, 대선 당시 특정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강요하는 등 위법행위로 항소했다. 법원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대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됐다. 수현씨는 기업을 이기는 게 쉽지 않다면서도 항소하길 잘했다고 말을 이었다. 

“증거가 없었어요. 녹취할 생각도 못 했고. CCTV를 증거자료로 요구했는데, 건물이 대표거라 공개 안 해도 되더라고요. 백화점 다니면서 라벨갈이 한 흔적을 모아서 제출했는데 그것도 기각됐어요. 증거라고는 저희 진술밖에 없었죠. 해고되고 2년 동안 소송한다고 시간 보내고 금전적으로도 손해를 봤는데, 그래도 잘 했다고 생각해요. 언론에 제보한 건 제가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 같아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줘야죠.”

▲ 갑질 폭언 자료사진. 사진=gettyimagesbank
▲ 갑질 폭언 자료사진. 사진=gettyimagesbank

갑질 피해 이직했더니 또 다른 갑질

비상구를 또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일을 시작하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패션계는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눈썹 반영구를 배웠고 홍대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에 타투이스트로 취직했다. 이런 데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건 의원도 똑같았다. 근로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야근수당이며 4대 보험도 없었다. 필요해서 뽑은 직원을 불법시술자라고 함부로 대했다. 재벌가 갑질을 피해 이직했어도 막말은 여전했고, 여전히 최저시급을 받았다.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던 1년 경력을 다 채우지 못한 건 4대 보험 때문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요구하자 의사는 직종란에 자필로 프리랜서라고 적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는데 왜 프리랜서냐고 따져 묻고 4대 보험 들어달라고 요구하자 ‘이렇게까지 빌어먹고 살고 싶냐’는 악담이 돌아왔다. 쉽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녹취를 하고 증거를 남기는 것. 수현씨가 부띠끄와 소송을 겪으면서 배운 것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항상 녹음하고 사진을 찍는 게 습관이 됐다. 의사와 나누는 대화들은 모두 녹음했고, 싸구려 마취제와 재사용해서 쓰는 바늘을 사진으로 찍어뒀다. 의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4대 보험은 안 들어주겠다며 수현씨를 내쫓았다. 다시 비상구를 찾았고 또 한 번 부당해고로 신고했다. 

부띠끄와 소송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법적 다툼을 시작하려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반복되는 갑질과 해고에 지칠 대로 지친 터였다.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시작한 일은 모두 갑질로 시작해 해고로 끝이 나, 끝나지 않는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유 없는 갑질과 두 번의 해고를 겪으며 깨달은 게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서 일하든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늘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 ‘재벌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라서, 의사들은 엘리트’라서 직원을 무시해도 되는 사회라면, 다시는 노동자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수현씨가 깨달은 건 또 있다. 한국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건 ‘서로 불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그와 비슷한 일을 겪은 친구들이 조언을 구하면, 일단 녹취부터하고 무조건 증거부터 남기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노동자를 믿지 않는 고용주를 믿을 필요는 없었다. 

수현씨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 취직은 선택지에 없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골로 이사했고 작은 가게를 열었다. 직원은 두지 않을 생각이다. 자신의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 만날 자신이 없었고 늘 우울했다. 잊고 싶은 욕설과 폭행은 어제 일처럼 너무 생생해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수현씨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는 언제쯤 끔찍했던 말과 눈빛을 잊을 수 있을까? 갑질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는 있는 걸까?

땅콩회항부터 맷집 폭행까지 온갖 ‘갑질’논란이 일 때마다 비난을 받으며 사회적 이슈가 되고 갑질 방지법도 생겼지만 갑질은 버젓하고 번역조차 되지 않는 갑질은 흔한 말이 돼버렸다. 노동자에게 갑질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갑질이라는 단어로 한 노동자의 고통을, 한 인간의 자괴감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을까. 수현씨는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 오늘은 잠들기를 바라며 끊지 못한 약을 털어 넣고, 오늘만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길 바라며 끊지 못한 술을 들이킨다. 그의 곁에는 반려견 보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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