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업무는 기본. 정규직은 관리만 하고 모든 실무는 프리랜서가 떠맡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보호해주지 않고 책임지고 퇴사시킨다.”

한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가 ‘방송계에서 일하며 느낀 문제점’을 묻는 실태조사에 익명으로 응답한 대목이다. CJB청주방송(대표이사 이성덕)의 고 이재학 PD가 처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원회’가 지난 11일부터 19일까지 9일 간 PD와 작가 등 방송계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82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에 나선 결과, 대다수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계약서 미작성부터 밤샘 노동, 직장 내 괴롭힘에 이르기까지 이재학 PD가 생전에 고발한 피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 이재학 PD 대책위는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프리랜서 착취를 감시할 ‘이재학법’ 통과를 촉구했다.

‘프리랜서’ 방송계 PD‧작가들 중 40.2%(330명)가 방송사와 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위탁·개인도급 등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경우(40.7%)도 이에 맞먹었다. 근로계약을 맺은 경우는 10명 중 1명에 그쳤는데, 응답자 84.1%는 근로 계약하지 않은 이유로 ‘관행이라서’와 ‘회사가 요구해서’를 꼽았다.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원회는 1일 국회 소통관에서 ‘방송사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원회는 1일 국회 소통관에서 ‘방송사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고 이재학PD 역시 회사 안팎에서 청주방송 PD로 불렸고 14년 일했지만, 청주방송은 그와 한 차례도 서면 계약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8년 동료 스태프의 인건비 인상과 충원 등 처우개선을 처음 요구했다는 이유로 구두로 해고됐다.

프리랜서들은 정규직보다 긴 시간 일했다. 응답자의 58.9%(483명)가 주 50시간 일하고 있다고 밝혔고, 68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는 31.8%에 달했다. 10명 중 3명이 휴일 없이 매일 10시간 일하는 셈이다. 한 달에 몇 번 밤새우는지 묻자 45.1%가 1~4번이라고 답했다. 열흘에 3번 이상 밤을 새우는 이들도 9.9%에 달했다. 밤새우는 경우가 없다는 답변은 30.8%에 그쳤다.

대책위는 이들의 노동환경이 프리랜서라는 지위 탓에 보호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은 “응답자 가운데 프리랜서로 하루 짧은 시간 일하는 이들이 섞여 있는 점을 감안하면, 방송계 비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은 전일제 노동자보다도 심각하다. 특히 근로계약도 없이 하루 10시간 이상 일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고 말했다. 고 이재학PD는 밤샘 근무를 자주 해 사내에서 ‘라꾸라꾸’란 별명이 붙었다.

또한 방송계 프리랜서들은 일반 직장인에 비해 갑절로 심각한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 중 66.5%(546명)가 지난 1년 새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비하·무시 등 ‘모욕과 명예훼손’을 겪은 비율이 49.8%였고 ‘부당지시’도 41.8%에 달했다. ‘따돌림·차별’은 33.9%로 뒤를 이었다. 이는 지난해 전체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비해 2배 높은 수치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0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사에선 10명 중 3명이 지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응답했다.

박점규 위원은 “지난해 일반 직장인 10명 중 3명 꼴로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겪었다며 고발하는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2배라는 조사결과는 놀라운 수치”라고 지적했다. 고 이재학PD도 생전 청주방송에서 일하며 이두영 회장의 교회 행사 촬영, 상사 술자리와 골프장 운전, 간부의 자녀 등교 지원 같은 부당지시를 수행했다고 고발한 바 있다.

▲‘방송사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재학 PD 유족 이대로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방송사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재학 PD 유족 이대로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방송 노동자들이 느끼는 문제점도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들은 ‘방송계에서 일하며 느끼는 문제’를 묻는 문항(2개 복수응답)에 ‘보수’(58.7%)와 ‘사회안전망 부재’(41.9%), ‘고용불안’(33.4%), ‘장시간 노동’(28.6%) 등을 고루 꼽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정부의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응답자의 71.7%(589명)가 근무조건 개선을 위해 ‘표준 근로계약서 작성 의무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에 맞먹는 비율(62.9%)로 ‘4대 보험과 실업부조 등 사회안전망 마련’을 꼽았다.

고 이재학 대책위는 1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방송계 갑질을 없애기 위한 시급 과제로 ‘이재학법’ 통과를 촉구했다. ‘이재학법’은 프리랜서 노동자 인정에 앞서 방송법상 ‘금지행위’에 프리랜서 대상 부당행위를 포함하는 게 골자다.

현행 방송법은 85조의2에 방송사업자 간 금지행위를 명시하고 있으며,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들 행위를 조사해 재승인 결정에 반영한다. 대책위는 방송법상 ‘외주제작사’에 프리랜서(방송사가 독립 사업자로 인정한 자)를 포함하고, 금지행위에 “외주제작사에게 현저하게 불리한 계약조건을 강요하거나, 적정한 수익 또는 권리의 배분을 거부·지연·제한하는 행위”란 조항을 신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20대 국회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금지행위 조항을 추가한 개정안을 발의한 만큼, 이재학법은 불필요한 정쟁 없이 즉시 입법이 가능하다”며 “국회가 이 두 줄만 추가했어도 고 이재학 PD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용기 독립PD(한국방송스태프협회 사무국장)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설문조사의 의미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도처에 제2, 3의 이재학 PD가 죽어가고 있고, 노동현장은 안전장치 없는 시한폭탄”라며 “20대 국회의원들이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모두 휴지조각이 됐다. 임금이 부족하고, 노동강도에 시달리더라고, 적어도 사람이 죽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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